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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불덩이 아이 안고 왕복 120km 원정진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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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경기도 여주의 주부 김주경(38)씨는 독감이 유행했던 지난해 12월 중순 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철렁하다. 당시 25개월 된 아들이 밤늦게 고열 증세를 보여 애를 태우다 다음날 오전 6시 소아과가 있는 여주 시내의 큰 병원으로 달려갔다. 진료는 오전 9시부터였다. 하지만 접수 창구에는 벌써 ‘소아과 접수마감’이란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김씨는 “새벽부터 온 환자들에다 재진 예약까지 겹쳐 이미 당일 진료예약이 모두 찼던 것 같다”며 “주변의 다른 소아과 2~3곳도 상황은 마찬가지여서 너무 당황스러웠다”고 말했다. 결국 이튿날 어렵게 접수한 다른 소아과에서 폐렴 진단을 받았다. 다행히 심하지 않아 항생제 처방을 받고 고비를 넘겼다. 김씨는 “여주에는 소아과가 부족해 전화를 100통 넘게 걸어도 예약 자체가 힘들다”고 토로했다.

가까운 소아과 없는 의료 취약지 #인제·합천 등 1시간 내 갈 병원 없어 #전화 100통 넘게 해도 예약 안 되고 #오전 6시에 가도 진료접수 끝나 #“정부 수급 미리 예측해 대비해야”

이 때문에 여주에선 아픈 아이를 데리고 다른 도시로 원정진료를 가는 경우도 흔하다. 학원강사 송태훈(35)씨는 지난해 갓 돌을 넘긴 아이가 새벽까지 열이 내려가지 않아 분당으로 원정 진료를 다녀왔다. 왕복 120㎞ 거리라 왕복 2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여주는 다른 지역들에 비하면 그나마 형편이 나은 편이다. 19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소아과가 거의 없어 주민들이 아이를 키우는 데 어려움이 큰 ‘소아과 의료 취약지’가 전국적으로 27곳이나 된다. 여주는 포함되지 않는다.

소아과 취약지

소아과 취약지

이들 지역은 ▶한 시간 내에 병원에 도착할 수 없는 주민이 30% 이상이고, ▶주민들이 받은 진료 건수의 70% 이상이 1시간 넘게 걸리는 병원에서 이뤄진 곳으로 대부분 고령화가 심각한 농어촌이다.

70여 일 전 강원도 인제에서 셋째를 출산한 박선주(37)씨는 혹시나 아이가 아프지 않을까 늘 노심초사한다. 이 지역의 동네 병원에선 갓난아이를 진료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응급 상황이 발생하면 1시간 넘게 차를 타고 속초나 원주 등 다른 지역의 병원으로 가야만 한다. 박씨는 “아이를 키우는 게 항상 불안하다”고 말했다. 경남 합천군의 안명기 보건소장도 “우리 지역에선 미취학 아이들을 다 모아도 500명 정도뿐이라 수요가 부족해 소아과가 거의 없다”고 소개했다.

정부에서 이들 지역에 대한 지원을 하고 있지만 효과는 크지 않다는 지적이다. 소아과 취약지 거점의료기관으로 지정되면 2억~3억원대의 지원금을 정부와 지자체가 50%씩 부담한다. 하지만 지자체의 재정이 여의치 않은 데다 의료인력(소아과 전문의 1명, 간호사 5명)을 구하기도 어렵다. 저출산 추세가 심화될수록 이 같은 소아과 취약지가 더 늘어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지역별로 필요한 병원 현황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 연세대 송인한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아이를 안심하고 키울 수 있는 기본 의료시스템이 구축돼야 저출산 추세를 늦출 수 있다”며 “정부가 의료서비스의 수요와 공급을 미리 예측해 대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추인영 기자 chu.in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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