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복고와 향수로 덮어둔 과거의 흉터와 화해하기

중앙선데이

입력

어릴 적 살던 집 근처에 가면 그 옛날 내 방의 창문을 올려다본다. 그러면 창문 너머로 그 시절 창문을 내다보던 나를 만나고, 순식간에 20여년을 건너뛰어 그 아련한 시간 속으로 돌아가곤 한다. 누구나 경험해 봤을 법한 그런 짠한 순간이 연극 무대에서 살아나 잔잔한 울림을 주고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2016 공연예술 창작산실 우수신작으로 공연 중인 연극 ‘툇마루가 있는 집’이다.

연극 '툇마루가 있는 집' #2월 26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창작공동체 아르케의 김승철 연출이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녹여낸 무대로, 요즘 40~50대 중견 작가들의 트렌드라 할 수 있는 ‘현대사 돌아보기 작업’의 일환이다. 격변하는 세상의 중심에서 정신없이 바쁘게 살면서 자기 자신이 누군지 조차 잊고 살아가는 중년들에게 ‘지금 여기 있는 나는 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재개발로 헐리게 된 한옥을 20여년 만에 찾아간 50대 초반의 연극과 교수 진구가 마당을 거닐다 1983년과 1979년을 오가며 그때의 가족과 자신을 만나는 설정이다. 우리 현대사의 격변기인 70~80년대로 타임슬립 하는 만큼 시끄러운 총성과 군홧발 소음과 화염병 연기를 배경으로 엄혹한 세상에 대한 저항과 좌절의 기억이 출몰할 것 같지만, 무대는 의외로 차분하다.

치매 걸린 할머니와 주정뱅이 아버지, 그럼에도 억척스레 가족을 지키는 어머니, 버스 차장과 호스티스로 일하는 셋방 아가씨들, 중동 파견노동자인 남편을 홀로 기다리는 만삭의 문간댁은 왠지 나의 과거에도 곁에 있었던 가족과 이웃인 듯한 착각이 든다.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영화나 드라마의 조연으로 숱하게 접해 온 친근한 인물들이 마치 홈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평범한 하루를 산다. 데모를 하다 맞아 죽은 걸로 암시되는 대학생 형의 넋만이 뭔가 이 집안의 특별한 비밀을 품고 있다.

과거와 대과거, 현재를 이어주는 연결고리는 겉절이 김치다. 유난히 겉절이 김치를 좋아했던 형을 가슴에 묻은 어머니는 83년의 오늘도 겉절이 김치를 담그고 있고, 제삿밥에 오른 김치를 맛있게 먹는 형의 넋은 79년 겉절이 김치를 유난히 맛있게 먹던 그날로 주인공을 데려간다. 83년의 가족들과 79년의 가족들은 같은 듯 다르다. 83년의 못말리는 치매 할머니는 79년만 해도 멀쩡히 가장 노릇을 하고 있었고, 83년 술에 쩔어 쓸쓸히 죽어간 호스티스 정양도 79년엔 삶에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극중 묘사되진 않지만 형을 죽음으로 이끈 대문 밖의 그 사건으로 인해 대문 안 사람들의 삶이 묘하게 달라진 것이다.

대문 밖에서 격랑이 몰아쳐도 대문 안에선 여전히 밥먹고 잠자며 살아야 했던 하루하루. 기왕 현대사 격변기를 다루면서 왜 이렇게 심심하게 그렸을까 의문도 든다. 행상 트럭에서 주워온 배추 시레기를 다듬어 겉절이 김치를 담그고 밤늦게 돌아온 셋방 아가씨에게 밥상을 차려주며 서로를 보듬는 따뜻한 장면들은 그저 향수를 자극하는 복고 코드일까.

하지만 바로 여기에 이 무대의 세련된 지점이 있다. 대문 밖의 사건을 절대 보여주지도 직설하지도 않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미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대문 안 가정의 사정은 대문 밖 사회의 상황을 상징하고 있다. 폭력적이고 무능하며 소통이 부재한 아버지 캐릭터는 대문 밖 위정자와 다르지 않다. 그에게 폭력을 당하면서도 도망치지 못하고 가족을 지키는 어머니는 위정자의 폭정에도 꿋꿋이 삶을 이어가야 하는 수많은 민초들을 대변한다. 아버지에게 살의를 품었지만 녹슨 양은 도시락통에 상처를 가둬놓고, 운동권 대학생이던 형의 죽음마저 외면한 채 살아온 진구는 어쩌면 민주화 운동에 빚지고 살아가는 대부분의 평범한 ‘386세대’ 중년들인지도 모른다.

“집이 무너지는데 장남이 꼭 가야만 했나?” 집 무너지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갔다. 다시 만난 형과의 대화도 뜻밖의 질문을 던진다. 아버지의 술주정, 할머니의 치매, 어머니의 고난과 같은 대문 안의 불행이 혹시 단순한 집안 일이 아닌 건 아닐까. 대문 밖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대문 안의 가정을 근본부터 흔들어 온 것인지도 모른다는-.

형의 넋을 만난 뒤 툇마루 밑 양은 도시락통에 가둬놓은 상처와 화해하는 결말은 사람은 과거를 딛고 미래를 그리며 현재를 사는 거라는 당연한 감상을 준다. 어디 사람만 그럴까. 툇마루에서 졸던 달콤한 기억 밑에 묻어놓은 짙은 상흔을 똑바로 바라볼 때 미래로 나갈 수 있는 건 대문 안 개인만은 아닐 거다. 대문 밖 사회도 따뜻한 향수로 포장된 과거가 품고 있는 해묵은 상처를 꺼내 제대로 치유할 때 더 좋은 내일을 향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창작공동체 아르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