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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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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유신체제 1기의 후반 2년 박대통령의 통치는 표면상 순탄했다. 학원과 종교계의 민주화 요구, 도시산업선교회와 가톨릭 농민회의 노동운동, 그리고 미국의 인권외교의 압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국민의 눈엔 그리 심각하게 비치지 않았다. 우선 야당인 신민당의 이철승체제는 투쟁노선을 택하지 않았다.
미국이 박동선스캔들로 한국정부를 몰아대고 주한미군철수 압력까지 가하던 때 신민당의 이철승체제는 초당 외교로 한몫을 거들고 국내화합에 나름의 역할을 모색했다.
학원과 종교계의 저항은 긴급조치에 의해 거의 신문에 보도 될 수 없어 일반 시민은 재야권의 요동을 알지 못했다. 그러니 정치는 표면상 어느 때 보다 평온한 듯 싶었다. 그러나 정치의 흐름을 가장 넓고 깊게 파악하고 있던 김재규정보부장의 눈은 위기가 가까이 있음을 실감했던 모양이다. 그는 매년 박대통령에게 유신1기를 끝내면서 유신체제의 대통령간접선거를 직접선거로 바꾸도록 두차례 건의했으며, 긴급조치 9호도 완화할 것을 건의했다고 말했다.
『그때는 소위 박동직사건으로 시끄러울 때라 3개월간 그 사건을 검토한 결과 한국인의 미국내 로비활동이 이스라엘이나 자유중국 등 다른 나라들에 비해 크게 문제될 것이 없는데 미국에서 유독 우리나라의 로비만 문제 삼는 것은 미국사람들이 한국의 독재체제를 마당치 않게 보기 때문에 독재를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77년2월말 대통령께 박동직사건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체제를 바꾸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솔직하게 건의했었다. 대통령은 미국은 왜남의 나라 내정을 간섭하는가, 미군들이 철수해도 좋다고 강경한 반응을 보일 뿐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직선해도 당선됩니다>
77년6월에도 대통령에게 「직선제에서 단독으로 출마하셔도 당선될 수 있습니다」라는 건의를 했다. 나는 직선제란 결국 유신체제의 철폐라는 생각으로 건의를 드렸으나 그것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79년7월과 8월에 긴급조치9호가 긴급조치 그 자체에 대한 비방조차 처벌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과 너무 광범하게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어 대통령에게 「긴급조치9호는 칼이 너무 녹슬고 무디어졌습니다. 시퍼런 칼을 주십시오」라는 말로 9호의 독소조항을 없애고 규제범위를 훨씬 줄인 10호를 건의했으나 박대통령은 나의 진의를 모르고 이 10호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라는 것.
김재규가 유신체제 변동을 건의한 것은 확인되고 있다. 박동선사건을 보고하면서 제시한 직선제는 그의 .사적 견해였으나 77년6월의 직선제 건의는 그의 막료들에게 직선제를 위한 종합적인 판단서를 만들게 했다는 것이 당시의 관계자들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긴급조치 9호의 변경건의도 수사기록에서 확인된다. 당시 정보부 어느 간부는 10·26후 수사당국에서 김부장이 9호의 규제범위를 줄이는 10호를 연구해 보라고 했다고 증언했었다.
78년은 선거의 해였다. 산발적인 저항이 있었지만 대통령 선거인단이 될 통일주체 대의원 선거를 거쳐 박대통령은 유신2기 6년의 임기를 열었다. l2월의 국회의원 선거는 관의 선거개입도 적어 무척 평온했다. 그랬는데 공화당은 득표율에서 신민당에 1·1%뒤졌다. 정부·여당은 표면상으로는 이결과가 바로 공명선거를 실증했다고 했지만 내면적으론 충격이었던듯 하다.
청와대 비서실은 내부용 선거결과 분석서를 작성했다. 정부·여당의 중요간부에게만 배포된 이 분석서는 공화당의 패배를 정책대결에서 야당을 선제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공화당 위에 재벌있다는 야당공세에 속수무책이었으며 의원의 무력감, 행정부의 관료주의를 손꼽았다.
그러면서 「야당의석은 비록 여당에 뒤지지만 득표결과를 대여투쟁에 자신있게 적용하여 대여공세의 방향전환을 모색할 조짐이 나타나고 있을 뿐 아니라 반체제 계열에서는 금번 총선을 통해 그들 주장이 민의를 반영했다는 나름의 판단을 내세우게 되고, 이러한 민심추세를 정부·여당이 받지 못할 때 그들은 그들에게 유리한 국면으로 유도할 수 있다는 기대를 걸고 있는 실정임. 정부·여당은 이러한 움직임을 경계할 필요가 있고… 큰 변화 없는 모습의 유신 제2기 출범이 될 때 국민의 실망이 더욱 가중될 것이라는 점을 유의해 국정전반에 획기적인 쇄신책이 긴요하다는 여론임.」
청와대비서실의 판단서였지만 국정은 쇄신의 길로 가지 않았다.
78년12월22일 박대통령은 내각을 개편하면서 김정령 청와대비서실장도 김계원씨로 바꿨다. 이 교체는 대통렴측근진의 파워게임에 변화를 가져왔다.
김계원씨를 비서실장으로 천거한 이는 김재규부장으로 알려졌었다. 김재규에 있어 김계원은 생명의 은인이다. 4·19 후 민주당 집권하에서 해군참모총장이 교체되던 때 육군대학의 총장·부총장으로 있던 두 김장군은 신임해군제독의 초청을 받아 마산에서 술을 마신 일이 있다. 그랬는데 저녁 늦게 진해로 돌아오던 길에 김재규가 탄 지프가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이때 뒤따르던 김계원장군이 이를 발견해 즉시 병원에 옮기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생명을 잃었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비서실장까지도 견제>
육군참모총장에서 예편한 뒤 잠시정보부장을 거쳐 주중대사로 나가있던 김계원장군은 노부모를 모시기 위해 국내의 자리를 원해 김재규에게 대통령께 그 뜻을 전해주도록 부탁해왔었다. 78년에야 박대통령은 김계원의 이같은 요청을 받아들여 귀국하게 됐다. 처음에는 영주-봉화에서 출마하게 되어있었으나 지역사정도 있고 해 출마는 포기했다.
그때 마침 유신2기를 맞는 내각개편이 있었고 대통령비서실장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김계원의 비서실장 기용이 전적으로 박대통령의 결정이었는지, 혹은 김재규 등의 천거를 받아들인 것인지 알 길은 없다. 다만 그 무렵 소문은 비서실장 교체에선 김재규부장과 차지철경호실장의 뜻이 일치했었다는 말이 있다. 김재규는 그의 선배이자생명의 은인인 김계원에게 보답하기를 원했고 더없이 가까운 사이인 그가 대통령 측근의 자리에 가게된다면 그에게 더할 수 없는 도움이 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차경호실장의 이해가 일치했다는 점은 좀 색다르다. 김정렴비서실장은 10년동안 비서실장으로 있었다. 은행·경제각료 출신인 김실장은 바깥에 위세를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늘에서 영향력을 키워왔고 대통렴을 보필하는데 있어서도 뛰어났다. 그는 청와대비서실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그러니 차실장이 대통령의 그림자로서 신임을 높여가고 있었어도 김실장이 쌓아 놓은 벽을 뛰어 넘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김부장은 그의 힘을 강화하기 위해 차실장 역시 청와대 내에서 그를 견제할 수 있는 또 한사람의 실력있는 인물을 내보낸다는 데서 이해가 같았던 셈이다. 그랬는데 결과적으로는 차실장의 계산이 더 적중했다.
김계원실장은 참모총강·정보부장을 지냈고 차실장에 비하면 군의 대선배였다. 그러나 합리적이고 유순했으며 체통을 존중했다. 그는 차실장이 비서실의 권한을 침범해도 대범했다.
김재규가 어느 때 했다는 말 그대로 예비역 육군 대장인 그가 군의 후배이자 예비역 중령인 차실장과 다투게 될 때 깎이게 될 자신의 체통탓에 애써 눈을 감았고 차실장은 도리어 그점을 활용하는 듯했다. 차실장의 월권은 점차 늘어갔다.
가령 예를들어 대통령의 면담을 조정하는 것은 비서실이다. 공식일정은 물론 그랬다. 그러나 비서실장이 교체되면서 대통령과의 면담이나 대통령나들이 때의 수행원을 정하는 일에서 그의 영향력이 비서실을 제치고 나섰다. 그런 사례들은 많다. 한 예만 예시하자.
79년1월의 신정연휴 박대통령은 부산해운대와 경주를 여행했다. 그때 경호실장에서 물러나 있다 10대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해 당선한 박종규의원이 오랜만에 대통령을 만났다. 박의원은 대통령에게 실정의사례를 얘기했다. 『…선거때 마산곳곳을 누볐는데 맹인들의 집단거주지는 다리조차 변변치 못한 강건너에 만들어 놓았고 높은 산중턱의 상이용사 집단촌도 마굿간이나 다름없는 판자촌에 8백가구가 사는데 변소조차 없고… 창원공단에 출입하는 외국인한테 보이면 안된다고해서 생선바구니장수를 부둣가에서 좇아버려 생계를 이을 길이 없게 만들어 버렸습니다.…유신체제가 능률만을 강조하다보니 행정관료들이 모두 위만 올려다보지 아래는 보지 않고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유신체제를 빙자하여 무사안일과 타성에 젖어있는 행정관료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해 대대적인 인사개편이 있어야합니다…』
이에 대해 대통령은 말을 안했다. 대답은 다시는 부르는 일이 없게된 것이었다. 그의 면담신청은 차실장에 의해 철저하게 차단 당했다. 그는 그로부터 근 1년간 대통령을 사적으로 만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차실장의 월권은 대통령 면회의 조정에서 어느새 인사와 정치의 간여로 그 폭을 자꾸만 넓혀갔다. 대통령의 판단의 자료가 되는 각종 정보까지도 별도의 채널을 갖고 간여하기 시작했다. 대통령직속기구의 책임자 세사람 중 차실장이 어느새 제1의 실력자로 올라서고 있었다.
김재규는 재판에서 『대통령의 신임을 놓고 내가 차실장과 암투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그의 부장의 이같은 법정 진술을 몰랐던 김의 부하 이기주는 그의 법정증언에서 이같이 말했다.『부장님이 뒤에 계신데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부장님이 평소 차실장에게 눌린다고 우리는 알고 있었다. 부장님이 보고서를 차실장에게 올리며 차실장에게 보고하러 간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다…』

<전임 박종규도 차단>
물론 이 부하의 증언이 맞는 말은 아니다. 보고서를 올린다는 대목은 사실과 다르다. 그러나 김재규는 대통령의 부름을 받을 때 말고 예정에 없던 대통렴면담이 필요해질 때면 차실장을 통해 시간을 얻어내야 했다.
차실장은 대통령의 뜻이니 지시를 내세워 김부장을 부르기도 했다. 그랬기에 김재규는 김계원비서실장에게 그가 나를 부르지, 그자가 내게 오는 법은 없다고 불평하기도 했고 어느 때는 대통령을 면담하기 위해 들어오면서도 비서실장을 만나러 오는 것으로 해 청와대로 들어가곤 했다.
김계원실장도 초기엔 차실장의 행동을 대범하게 넘기려 했지만 업무간여가 심해지면서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한 듯 하다. 그는 어느 때 대통령에게 청와대에서 정치문제에 직접 손을 대는 것은 좋지 않다는 간접화법으로 차의 정치간여를 막도록 건의했었다. 그러나 대통령은 차실장은 국회의원을 4차례나 해 정치문제를 잘 알기 때문에 실수 없이 할 것이라고 대답, 이 건의를 묵살했다고 한다.
박대통령의 판단착오는 차실장이 정치문제를 잘 알기 때문에 실수 없이 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궁정동의 비극이 바로 차실장의 정치간여가 만들어낸 실책과 그 실책으로 인해 궁지에 몰린 김재규의 폭발이라는 점에서 대통령에겐 자못 치명적이다.
대통령은 차실장이 스스로의 판단아래 행한 정치공작이 성공하지 못했고 도리어 일을 그릇치고 있는데도 차를 신뢰했다. 거기엔 또 그런대로의 연유가 있었다.
차지철은 민정이양 때 경호대쪽에서 국회에 진출한 단 한사람이다. 그 때문에 그는 파워게임을 위해 국회에도 눈을 돌린 박종규실장의 원내교두보로서 유멸난 후원을 받았다. 그는 이미지관리에 매우 신경을 썼고 공부하는 모습을 보였다. 국방위원회에 배속된 그는 안보에 관한 글을 자주 신문에 기고했다. 그는 대통령의 측근임을 활용해 젊은 학자들의 두뇌를 활용했고, 각계에 접촉을 넓혀갔다.
월남파병 문제가 나오자 파병의 조건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 개정안을 국회에 냈다. 미국측의 반대로 이것은 실현 불가능한 제안이긴 했지만 그는 대미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미국이 대미비판을 중지하도록 압력을 가했다는 소문까지 나돈 것이 그때다. 그런데 차의원 발언은 월남파병을 하기로 작정하고 이 기회에 실리를 더 많이 얻어 내고자하는 박대통령의 뜻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때 그에게 그같은 발언을 하도록 한 것은 박종규실장이었으리라는 추측들이 있었다.
박대통령은 차의원의 대미발언을 포함해 이런 저런면의 충성심을 보고 그에게 높은 점수를 주었다.
박대통령은 그이후 또 색다른 역할을 맡겼다. 대통령은 은퇴한 원로들에게 특별한 배려를 했다. 이럴때 대통령의 뜻을 전달하는 일을 차의원에게 맡긴 것이다. 그러던 그의 역할은 얼마 후 야당의 원로에게까지 확대되었다. 그는 대통령과 대통령이 특별히 배려하는 원로 사이를 연결하는 메신저 역을 했다.
국회 외무위원회는 여야의 원로들이 배치되는 국회내 원로원 격이다. 당총재인 박대통령이 차의원을 외무위원장으로 지명했을때 모두들 너무 잘못된 인사라고 했지만 대통령으로선 숨겨진 그런 곡절이 있었다.
차의원이 야당에 개입한 것은 74년부터로 알려져 있다. 병로한 유진산총재 이후 시대를 준비하던 그해 전당대회는 무려 5명의 경쟁자가 나선 혼전이었다.
그때 대화에선 신민당의 원로였던 김의택씨, 그리고 이철승씨가 유진산노선을 계승하는 온건노선이었고, 김영삼씨가 반유신을 선명히 한 강경노선, 고흥문·정해영씨 등이 그 중간입장을 취했다.
정부·여당으로선 김의택·이철승씨 둘 중의 어느 한사람이 당총재로 되기를 선호했다.

<김의택씨 지지 빗나가>
그랬지만 대회가 임박할 때까지도 얼마간 혼선이었다. 그럴때 차지철의원은 처음부터 김의택씨를 지지했다. 결국 정부·여당은 막판에서야 차의원의 판단을 따랐다. 그러나 신민당 전당대회는 차의원이 말한대로 되지는 않았다. 신민당의 김영삼체제는 유신철폐를 내걸고 거칠게 도전했다. 박대통령은 이 도전을 극복하기 위해 2년전 국민투표로 ▶작정한 유신헌법에 대한 또 한번의 찬·반투표를 하기까지 했다.
때는 이미 경호실장이 되어있던 차실장은 야당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처음엔 따르지 않았던 정부·여당 관계자들을 대통령에게 성토했다. 차실장은 이렇듯 처음부터 정치간여의 위험을 안고 있었다.
차실장이 대통령의 대리자처럼 군림하기 시작한 것은 유신1기가 끝나가던 77년부터다. 그의 정치색깔은 유신2기의 정부·여당 재편성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는 국회와 여당, 그리고 대야관계 조정에서 모든 것을 독단하려했다. 대통령도 그에게 편향했다.
유신2기의 국회의장으로 백두진의원을 지명한 것은 거실장의 천거에 따른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유신체제를 반대해온 야당이 지역구의원도 아닌 임기3년의 유정회소속의원의 국회의장선임을 비토할 것은 분명했다. 차의원은 유신2기에 예상되는 야당의 도전을 누르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기를 꺾어야 한다고 판단한 듯 했다. 정부·여당은유정회의원의 국회의장비토는 유신체제의 거부라며 야당에 압력을 가했다.
신민당의 이철승체제는 이 압력에 온건하게 대처했고 이것은 그렇잖아도 2년동안 들끓고 있던 야당의 노선논쟁에 불을 붙였다. 차실장이 초년 신민당의 5·30전당대회에 깊이 개입하는 출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바로 차실장의 이같은 본격적인 개입이 김재규와의 경쟁과 갈등을 돌이킬 수 없는 막다른 길목에 몰고 가는 출발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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