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에게 실망했던 경험이 꽤 된다. JTBC 오디션 프로그램 ‘팬텀싱어’ 1회를 보다가 흥행이 될 리 없다며 채널 돌렸음을 고백한다. 노래의 장르는 애매하고 유행이 지난 것처럼 보였다. 웬만한 사람은 다 감동 받은 후인 지금, 우승자도 알면서 복습 시청하며 죄값을 치른다. 사실은 드라마 ‘도깨비’도 그랬다. 뿐만 아니라 SNS가 처음 나왔을 때는 부질 없어 보였고, 누가 저걸 하랴 싶었다.
어떻게 작품을 알아볼 수 있을까. 어떤 흥행은 나 같은 사람을 아찔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지난해 3월 스위스 제네바의 한 공연에서 이 곡이 연주됐다. 바이올리니스트는 바딤 글루즈만(44)이라는 한창 때의 연주자다. 무엇보다 그의 악기가 중요했는데, 1690년 만들어졌고 레오폴트 아우에르(1845~1930)라는 연주자가 쓰던 것이었다. 아우에르는 누구인가.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가로부터 헌정 받고도 “기교적으로 도저히 연주할 수 없어 문제가 많다”며 외면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지금 이 곡은 연주할 때마다 천둥 같은 박수를 이끌어내는 흥행 만점의 작품이다. 지난해 제네바의 공연에서도 그랬을 거다. 아우에르의 악기만이 겸연쩍게 침묵했을 것이다.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기교적으로 뛰어난 연주자들이 나오기 전까지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 또한 비슷한 운명을 겪었다. 작곡가에게 작품을 헌정받은 피아니스트 니콜라이 루빈스타인(1831~81)은 어떤 가치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결국 메가 히트한 이 곡은 이제 길 가는 초등학생에게 들려줘도 알아차릴만큼 유명해졌다. 아우에르와 루빈스타인 모두 차이콥스키가 찾아가 작품을 바칠 정도로 당대를 휩쓸던 연주자들이었다. 이들이 허투루 작품을 폄하했을 리는 없고, 아마도 차이콥스키의 혁신성을 담아내기 버거웠을 것이다. 미래의 청중을 불러모으는 것 또한 그 혁신성이고 말이다.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오프닝 때문에 비판을 많이 들었다. 피아니스트에게는 음악적이라기보다 체력적으로 한계를 시험하는 곡이다)
이런 처지를 겪은 게 어디 차이콥스키 뿐인가.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1번, 베토벤 교향곡 7번,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도 거센 비판을 이겨내고 우뚝 섰다. 작품과 작곡가의 위상이 높아질수록 후회도 막심해졌을 연주자나 평론가들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초연에서 받은 비판으로 치면 이 곡을 따라올 수 없다.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 당시 청중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만큼 앞서 가버린 작품이었다)
예술 작품이 살아남거나 인기를 얻는 데에 훨씬 많고 복잡한 조건이 붙은 시대다. 우리는 어떻게 가치를 알아보고 예측할 수 있을까. 내 취향이 아니라고, 혹은 명백히 촌스럽다는 이유로 어떤 것들을 외면하다가도 문득 뒷덜미가 서늘하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