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공단 폐쇄 1년 만에 사장님서 식당보조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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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년 전 (박근혜 대통령의) 개성공단 폐쇄 결정은 아무런 대책도 없이 성급한 판단에서 이뤄졌어요.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아쉽고 가슴 아픈 일입니다.”

납품업체 이끌던 고재권씨 생활고
“남북 평화공존 무대 다시 열릴 것”

개성공단 입주 기업을 상대로 부품 등을 납품해온 중소업체인 태진티제이 고재권(54) 대표. 1년 전까지는 의젓한 중소업체 사장으로 일하던 그가 개성공단 가동 중단 여파로 지금은 주방보조로 허드렛일을 하고 있다. 천당과 지옥을 오간 지난 1년이 그에게는 꿈만 같다.

그는 2010년부터 개성공단을 드나들며 입주 기업 등에 자동차 및 자전거부품·사무용품 등을 납품해 왔다. 그러다 지난해 2월 느닷없이 이뤄진 개성공단 폐쇄 조치로 졸지에 생계 수단을 잃었다.

개성공단 폐쇄로 사업체를 잃은 고재권씨가 오리백숙 식당 주방에서 일을 하고 있다. [사진 김성룡 기자]

개성공단 폐쇄로 사업체를 잃은 고재권씨가 오리백숙 식당 주방에서 일을 하고 있다. [사진 김성룡 기자]

그는 공단에 있던 영업사무소에 쌓아 둔 부품과 자재 등 3500만원 어치를 그대로 날렸다. 지난해 이맘때쯤 설을 쇠러 남쪽으로 내려왔다가 폐쇄 결정 소식을 듣고 급히 현지로 달려갔다. 하지만 파주 통일대교에서 출입이 막히는 바람에 발이 묶였다. 전 재산이나 다름없던 물품은 수도권 등지를 돌며 발품을 팔아 떼온 것들이었다. 주요 거래처였던 개성공단 입주 기업들이 함께 폐쇄되는 바람에 남쪽에서도 더이상 기업활동을 이어갈 수 없었다.

월세를 낼 형편도 안 돼 지난해 5월부터는 월셋집에서 나와 딸과 함께 서울 부모님 집으로 들어가 얹혀 살고 있다. 일자리를 찾아 나선 그는 지난해 8월부터 11월까지 경기도 고양시 일대에서 ‘찾아가는 자전거 수리’ 일을 하며 월 140만원을 벌어 생계를 이었다. 개성공단 북한 근로자들이 출퇴근 때 타고다니던 자전거 부품을 납품하면서 어깨 너머로 배운 수리기술이 도움이 됐다.

딸과 함께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미숙한 손으로 하루 8시간씩 땀을 흘렸다. 하지만 이마저도 겨울이 되면서 끊기자 지난해 12월부터는 친척이 운영하는 서울 화곡동 소재 한 오리백숙 식당에서 하루 10시간씩 주방보조로 일하고 있다.

이처럼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지만 정부로부터 보상 한푼 받지 못했다고 했다. 지난해 12월에야 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 직원이 지원책과 관련한 설명을 해준 게 고작이라고 한다. 고씨는 “예견할 수도 없었고, 납득하기 어려운 급작스런 개성공단 폐쇄 이유에 대해 이제는 짐작 가는 바가 있다”고 말했다. 최근의 국정농단 사태를 보면서 개성공단 기업인들 사이에서도 “개성공단 폐쇄 결정 과정에 국정농단 세력이 개입하지 않았겠느냐”며 의구심을 제기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남북이 어렵게 키워온 개성공단은 남북 경제협력의 장을 넘어 남북 평화공존의 무대라는 점에서 반드시 다시 열려야 하며, 열릴 것으로 믿는다”고 힘주어 말했다.

고양=전익진 기자 ijjeon@joongang.co.kr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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