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램서 낸드플래시로 … 반도체 2차 치킨게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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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2위 도시바 지분 매각 … 글로벌 인수전 후끈

반도체 ‘쩐(錢)의 전쟁’이 다시 시작됐다. 1990년대 D램 시장에서 벌어졌던 이른바 ‘치킨게임’이 ‘대량 생산, 저가 판매’의 출혈 경쟁이었다면 이번 경쟁은 미래 시장 선점을 위한 알짜 기업의 지분 인수를 놓고서다.

포연이 피어오른 건 일본 도시바가 낸드플래시 분야 지분을 매각하기로 결정하면서다. 도시바는 최근 “낸드플래시 분야를 자회사로 독립시키고, 독립한 회사의 지분을 최대 20% 미만 선에서 매각하겠다”고 밝혔다. 매각 대금은 3000억 엔(약 3조원). 도시바는 원자력 발전 사업에서 최근 7000억원대의 손실을 보자 이를 벌충하기 위해 낸드플래시 지분 매각에 나섰다. 외신과 투자은행 업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를 비롯해 도시바의 기존 합작사인 미국 웨스턴디지털, 대만의 훙하이, 사모펀드인 미국의 베인캐피털, 유럽 퍼미라 등 10여 곳이 도시바 지분 매각 입찰에 응했다.

하이닉스 가세 약점 보강 노려
빅데이터·IoT 시장 확대 대비

인수 성공 땐 기술 협력 가능
‘수퍼사이클’ 수혜자로 부상
일본 내 반한감정 막판 변수

도시바의 지분 매각이 글로벌 반도체 업체들의 구미를 당기고 있는 건 이 회사의 낸드플래시 기술력이 세계 최고 수준이기 때문이다. 도시바는 세계 최초로 낸드플래시를 개발한 회사로, 현재 삼성전자(35.4%)에 이어 낸드플래시 시장점유율 2위(19.6%)다.

낸드플래시는 성장 가능성도 크다. 메모리 반도체는 크게 D램과 낸드로 나뉜다. D램은 데이터 처리 속도는 빠르지만 전원이 꺼지는 순간 처리하던 데이터의 기억도 사라진다. 그러나 낸드는 데이터 처리 속도는 D램에 비해 다소 느리지만 전원이 꺼져도 정보가 계속 남는다는 강점이 있다. 클라우드·빅데이터·사물인터넷(IoT)이 확산하면서 낸드 시장은 매년 40% 안팎으로 성장하고 있다. 시장조사기관인 IC인사이트에 따르면 낸드와 D램의 시장 규모는 지난해 각각 319억 달러와 451억 달러였다. 하지만 2020년엔 낸드 시장은 383억 달러로 성장하지만 D램은 412억 달러로 오히려 규모가 줄어들 전망이다. 박현 SK하이닉스 홍보팀장은 “D램에 비해 낸드의 성장성이 두 배 이상 크다”고 설명했다. 특히 SK하이닉스의 경우 D램에서는 세계 2위에 올라 있지만 낸드에선 10.1%의 점유율로 5위인 데다 지난해까지 이 부문에서 적자를 봤다.

익명을 요구한 업계 관계자는 “SK하이닉스가 지분 20%를 확보하더라도 경영권과는 무관한 재무적 투자자에 머물게 된다. 하지만 주요 주주가 됨으로써 장기적으로 기술 협업 파트너가 될 기회를 얻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간 SK하이닉스는 D램에 치중된 매출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충북 청주에 낸드 공장을 신설하고 시게이트와의 합작회사 설립에 나서는 등 공을 들여 왔다.

업계에서는 이번 인수전의 최종 결과에 따라 낸드플래시의 시장 지배력에도 변화가 올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SK하이닉스·웨스턴디지털·훙하이 3사 중 하나가 최종 인수 대상으로 선정되면 2위 도시바의 점유율과 합쳐 삼성전자(36.6%)를 위협할 ‘빅2’로 성장할 수 있어서다.

이해영 HMC투자증권 연구원은 “최종 승자는 공급 부족을 겪을 정도로 호황을 맞으면서 가격이 치솟고 있는 반도체 수퍼사이클의 과실을 온전히 누릴 전망이어서 인수전도 치열할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업계에서는 막판 변수로 일본 측의 ‘몽니’를 꼽는다. 일본은 2015년 삼성전자가 샤프 인수에 나섰을 때도 삼성 대신 훙하이를 택했다. 당시 샤프를 인수한 훙하이는 최근 삼성전자에 TV용 디스플레이 납품을 끊는 등 ‘타도 삼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또 2015년 SK하이닉스가 도시바의 이미지 센서 공장 인수를 추진했을 때도 이를 소니에 넘긴 바 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2012년까지 낸드플래시 1위를 달리면서 ‘일본 반도체의 자존심’이라 불리던 도시바는 한국 기업에 1위를 내주면서 격차를 줄이지 못하고 있다”며 “한국 기업에 지분을 내주는 데 대한 일본 내 정서적 거부감이 인수전의 변수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인수협상우선대상자는 이르면 이달 말 결정된다.

박태희·김경미 기자 adonis55@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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