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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아 손혁 이제 시작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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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미운 하늘은 꼭 결정적인 순간에 한번 더 능력을 시험한다. 그냥 순탄하게 재기의 무대를 축하해 주면 뭐 어때서 말이다. 벌써 여섯경기나 시험무대에 올랐고, 그 가운데 1승도 못 올리고 4패를 기록했다.

속으로 '그만하면 됐지'라는 생각도 들건만, 이번에도 또 마지막 순간에 한번 더 시험이다. 승리투수 자격을 갖추는데 아웃카운트 하나만을 남겨놓은 5회초 2사 후. 팀이 4-0으로 앞서 있어 한 타자만 잡아내면 감격의 승리가 확실해지건만, 하늘은 야속했다.

주자 1, 2루에 '하필' 이승엽(삼성)을 타석에 들여놓은 것이다. 여기서 큰 것 한방을 맞으면 동점 위기에 몰리는 것은 물론이고 마운드를 내려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또 승리의 문턱에서 주저앉는 것이다. '승부를 피해?' 그건 더 안 된다. 이승엽의 뒤를 받치는 마해영의 컨디션이 요즘 더 좋다.

정면승부다. 우선 유인구. 두개를 던졌는데 이승엽이 말려들지 않는다. 볼카운트 0-2. 이제 막다른 골목이다. 문득 지루했던 재활기간이 스쳐 지나간다. 물러설 수 없다는 다짐을 한번 더 한다. 포수 홍성흔의 미트를 노려보고 이를 악물고 던진다. 이승엽의 방망이가 기다렸다는 듯 나온다. 파울. 그 다음에도 파울. 볼카운트 2-2.

마운드의 손혁(30.두산.사진)은 그때서야 비장의 무기를 꺼낸다. 이승엽이 서두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포크볼이다. 공이 '뚝!'하고 떨어지는 순간 이승엽의 방망이가 춤을 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경쾌한 타구음도, 관중들의 환호도 없다. 그때 홍성흔이 미트를 번쩍 들며 이승엽의 몸을 태그한다. 삼진이다. 5이닝 무실점. 4-0의 리드. 이제 됐다. 시즌 일곱번의 선발 만에 승리투수에 가장 가까이 갔다. 6회초 1사 후 삼성 브리또에게 2점홈런을 맞고 내려온다. 5와3분의1이닝 2실점. 89개를 던졌지만 하나도 아프지 않은 어깨. 그리고 관중의 격려. 모든 게 꿈만 같다. 경기가 5-2로 끝나고 승리투수가 됐다. 1년 만의 승리다. 기아에서 두산으로 팀을 옮긴 뒤 첫 승리다.

2000년 LG에서 해태로 트레이드된 뒤 미국 유학-야구 복귀-오른쪽 어깨 부상-재기-부상 재발-재활 뒤 복귀-또다시 재발-어깨 수술-재활-그리고 재기의 산전수전을 겪은 손혁은 7일 저녁 잠실에서 그렇게 다시 태어났다.

"데뷔전 때보다 더 떨렸습니다. 이제 자신감이 생깁니다. 올시즌을 아프지 않고 마친다면 내년에는 더 많은 준비를 해서 10승을 올릴 자신이 있습니다." 새로 태어난 손혁이 소감으로 던진 말이다.

이태일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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