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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때 계엄군 경계 뚫고 혈액 나른 ‘적십자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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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호 02면

[삶과 추억] 서영훈 전 적십자 총재

서영훈(사진)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4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94세. 서 전 총재는 흥사단 이사장과 새천년민주당 대표 최고위원,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상임대표 등을 역임했다. 박지원 국민의당 대표는 “시민사회를 대표하는 이 시대 마지막 선비가 숨졌다”고 말했다.

1923년 평안남도 덕천에서 출생한 그는 53년 대한적십자사에 들어가 30년 동안 한우물을 팠다. 환경보호운동과 헌혈운동을 열성적으로 이끌어 ‘적십자맨’으로 불렸다. ‘사람은 자연보호, 자연은 사람보호’란 표어가 바로 서 전 총재의 작품이다. 조성두 흥사단 정책기획위원장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염군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광주 시내로 혈액을 나른 건 지금도 회자되는 유명한 일화”라고 말했다. 고인은 청소년적십자(RCY) 운동에도 열성적이었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62년 충주고 재학 시절 적십자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으로 건너갔고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 외교관의 꿈을 키웠다.

83년 흥사단 이사장에 취임한 서 전 총재는 민족통일운동과 투명사회운동을 통해 도산 안창호 선생의 정신을 계승했다. 2000년에는 새천년민주당 대표 최고위원으로 정계에 입문해 11개월 동안 일했다. 정대철 국민의당 고문은 “노무현 신화가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을 마련한 분”이라고 평가했다.

남북평화통일은 서 전 총재의 영원한 꿈이었다. 72년 처음으로 개최된 남북적십자회담에 참여한 그는 2000년 열린 남북정상회담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박지원 대표는 “남북정상회담의 숨은 공신 중 한 명”이라고 말했다. 2000년 12월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취임하면서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과 이산가족상봉 실무작업을 이끌었다. “잠들기 전에 대한민국과 북한동포의 평안과 행복을 위해 기도한다”던 서 전 총재는 남-북의 대화 채널을 강조했다.

“대화가 끊어지면 평화도 깨진다는 게 역사적 교훈입니다. 개인과 조직도 그렇고 국가나 민족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경우라도 대화 채널을 닫으면 안 됩니다.”

빈소는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 마련됐다. 발인은 2월 7일 오전 9시. 장지는 국립현충원이다.

강기헌 기자 emck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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