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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둘이 사랑하게 해 주세요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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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호 22면

"사랑을 하면 범죄자처럼 생각하게 된다"고 말한 건 영화 ‘캐롤’의 주인공 루니 마라였다. 그녀는 이 영화에서 이혼 소송 중인 남편에게서 딸을 데려오기 위해 고군분투 중인 여자 캐롤을 사랑하는 백화점 직원 테레즈로 나온다. 배우 인터뷰를 먼저 읽고 영화를 보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이번에 읽은 ‘범죄자처럼’이란 그녀의 말이 눈에 계속 걸렸다.

백영옥의 심야극장 <40> 영화 '캐롤'

토드 헤인즈 감독의 영화 ‘캐롤’을 보는 내내 가슴이 심하게 울렁거렸다. 캐롤과 함께 떠난 여행이 중단돼 홀로 뉴욕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테레즈가 뛰어나와 토하는 장면을 보는데, 늑골이 욱신거렸다. 암실에서 자신이 찍은 캐롤 사진을 내려다볼 때 짓던 무표정에는 마음이 어는 것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세상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이미 수천 매가 넘는 소설에서 그려본 적 있으므로, 그것은 내게 생생한 아픔이었다. 마치 불에 덴 것처럼, 심장에 망치질을 하는 것처럼, 칼에 베인 것처럼, 테레즈의 마음은 아플 것이다. 

미국 컬럼비아대 연구진은 실연 경험이 있는 40명에게 헤어진 연인의 사진을 보여주었더니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팔에 뜨거운 것이 닿았을 때와 동일한 뇌 부위의 자극이 일어난다는 것을 밝혀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음의 상처를 무시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삶을 일시에 혹은 서서히 붕괴시킨다. 실연당한 테레즈의 초점 잃은 눈은 유령을 바라보는 것처럼 멍하고, 목소리는 심하게 갈라져 있다. “내가 당신을 너무 독차지했어요.”

마음은 죄책감이란 이름으로 자신을 끝없이 단죄한다. 헤어진 지 30일. 수없이 망설이다가 캐롤에게 전화를 거는 테레즈의 손끝에서 나는 떨림 이상을 읽었다. 이미 끊어진 수화기에 대고 “보고 싶어요, 보고 싶어요”를 되뇌는 목소리가 영영 잊힐 것 같지 않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울고 싶은 마음을 견뎌야 했다. ‘캐롤’의 GV 행사장이었기 때문이다. 영화가 끝나자마자 평론가와 영화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 자리였다. 여자와 여자의 사랑 앞에서 내가 이렇게 무너져 내릴 줄은 몰랐다. 

원작 소설이 있는 대개의 영화의 경우, 소설보다 영화를 좋아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하지만 ‘캐롤’ 만큼은 영화가 더 좋았다.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빅팬이라 그녀의 책을 모조리 읽었다는 걸 감안할 때, 내겐 좀 놀라운 일이었다. 나는 이 영화가 소설만이 보여줄 수 있는 ‘행간의 공기’를 어떻게 부수어버렸는지 논평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충혈된 눈 때문에 결국 렌즈를 빼고 안경을 낀 후 무대에 오른 나는 다짜고짜 이렇게 말해버렸다. “두 사람이 꼭 이루어졌으면 좋겠어요!”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 이상 헤어지지 않는 세상 이상의 천국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너무 행복하면 두려워지는 이유

1950년대 초 뉴욕, 사진가를 꿈꾸는 테레즈는 자신이 일하는 백화점에서 딸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기 위해 들어온 캐롤을 첫 눈에 ‘알아본다’. 그렇게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고, 말이 섞인다. 캐롤이 매장에 두고 간 장갑을 찾아주면서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점심 메뉴 하나 고르는 간단한 선택에도 늘 곤란함을 느끼던 테레즈는 캐롤의 모든 질문에 간결하게 대답한다. “네! 좋아요!”

테레즈의 영혼에 변화가 생겼다는 징조는 그녀의 눈빛이 점점 촉촉해지는 것과 무관치 않다. 나무나 창문 같은 사물만 찍었던 테레즈는 자신도 모르게 캐롤을 향해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선택장애가 있던 테레즈의 세계가 명확해진 건 그녀의 눈에 캐롤 이외의 사람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선택의 분명한 기준이 생겼기 때문이다. 소실점을 향해 이어지는 풍경을 보듯 두 사람의 마음이 하나로 달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게 좋았다. “어디에서 날아들었을까, 나의 작은 천사”라고 말하며 테레즈의 이마에 키스하는 캐롤의 말을 나는 단박에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테레즈가 찍은 캐롤의 얼굴에서 평생 고립된 채 살았던 비밀스런 사진가 비비안 마이어의 그림자가 보였다. 비 내린 자동차 유리창에 스민 테레즈의 새벽안개처럼 뿌연 얼굴에선 뿌리 없이 부유하는 에드워드 호퍼의 주인공들이 떠올랐다. 

사랑은 이토록 충분히 위태로운데, 이들을 더 위험하게 만드는 건 캐롤의 남편 하지다. 그는 오래 전에 끝장난 관계임에도 딸을 매개로 캐롤을 끝없이 조종하려 든다. 그녀의 마음에 ‘질병’이란 딱지를 붙이고 그녀를 수정하려 든다. 그는 첩자까지 붙여 캐롤과 테레즈의 자동차 여행을 추적한다. 불안한 그들의 여행이 음모로 끝장나기 전까지, 테레즈와 캐롤이 맛본 건 '천국'이다. 

“테레즈는 이게 바로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지극히 완벽해서 귀하디 귀한 존재. 대단히 귀해서 이런 행복이 있는지 아는 이가 거의 없었다. 그저 행복하기만 했지만 그 행복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자 다른 존재, 지나치게 부담스러운 존재로 변모했다. 손에 든 커피 잔, 저 아래 정원을 빠르게 가르는 고양이, 구름 두 개가 소리 없이 맞부딪히는 모습까지도 테레즈가 참을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 한 달 전만 하더라도 갑자기 찾아드는 행복이 뭔지 몰랐던 테레즈. 그 여파로 지금 자신의 상태까지 이해하지 못했다. 유쾌하기보다 오히려 이따금씩 고통스러웠다. 자신에게만 심각한 흠이 있는 건 아닌지 두려웠다. 골절된 척추로 걷는 것만큼 겁이 났다.” 

소설 『캐롤』에서 내 마음에 가장 깊게 남은 문장은 이것이었다. 행복이 두려움으로 번져 통증으로 번진 상태. 하이스미스의 이 긴 문장을 영화에선 단 한 장면으로 압축한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정지해버리는 세상으로. 
너무 아름다운 것을 보면 눈물이 흐른다. 너무 행복하면 두려워진다. 시인 릴케는 그 이유를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가까스로 견딜 수 있는 무서움의 시작”이라고 했다. 너무 행복하면 그것을 손에 쥐고 싶어진다. 그러나 아름다움도 행복도 그것을 가지려는 순간 미끄러진다. 소유할 수 없는 것에서 우리는 절망과 공허함을 느낀다.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 때문에 ‘미리’ 슬퍼지는 것이다.

영화 '캐롤', 일러스트 김옥

영화 '캐롤', 일러스트 김옥

"제 기질대로 살지 못하는 게 타락"

딸의 양육권을 되찾기 위해 테레즈와 헤어지고 심리치료까지 받아들였던 캐롤이 긴 법정 다툼 끝에 남편에게 하는 말은 ‘나답게 사는 것’에 대한 질문이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괴물’이란 말은 결국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이다. 하이스미스는 소설에서 “이런 게 타락 아니겠어. 다시 말하자면, 자신의 기질대로 살지 못하는 것, 그걸 정의하자면 타락인 거야”라고 말한다.

후배의 청첩장을 받던 날, 나는 ‘누구누구의 차녀’ 혹은 ‘누구누구의 장남’으로 선언된 아름다운 두 남녀의 이름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들이 주인공인 그들 개인의 결혼식이었으나 그들만의 결혼식이 아닐 이 일이, 앞으로 이들에게 미칠 파장을 조용히 헤아렸다. 나로 사는 것. 누군가의 엄마나 딸이나 아내가 아닌, 온전히 나로 기능하며 사는 일의 지나친 고단함과 어려움에 대해서 말이다. 더구나 ‘캐롤’은 1950년대 사람이었으니….


“테레즈. 이렇게 예뻐지고. 활짝 핀 꽃 같아. 나랑 헤어져서 그런가?”
캐롤이 말한다. 테레즈가 묵묵히 듣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말은 그것 너머의 행간을 읽어야 한다. 캐롤은 테레즈에게 그녀를 위해 ‘놓아준다’고 말했지만, 그녀의 말은 자신을 위해 ‘기다려 달라’고 읽었어야 했다. 신변을 정리한 캐롤이 테레즈를 찾아가 함께 살자고 했을 때, 테레즈가 했던 “아니!”란 말은 실은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서 당신이 (내가) 미웠다”라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랑은 감정의 시차 때문에 어긋난다. 영화를 보는 우리는 알지만 그들은 알 수 없는 진심이 어긋날 때, 그러므로 우리가 바라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은 기어이 다시 만나야 한다는 것. 용기를 내 캐롤을 다시 찾아오는 테레즈의 눈빛에 눈물이 났던 건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용기란 끝없이 밀려오는 두려움을 참으며 그토록 간신히 쥐어짜는 ‘힘’이란 걸 알기에. 과거를 바꿀 수 있는 건 바로 지금 이 순간뿐이란 걸 이미 배웠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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