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율·정치자금·검증공세 삼중고에 일찍 링 내려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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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1일 오후 국회 정론관에서 대선 불출마를 선언한 뒤 나와 차량에 탑승하고 있다. 지난달 12일 유엔 사무총장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며 대선 출마 뜻을 밝힌 지 20여 일 만이다. [뉴시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1일 오후 국회 정론관에서 대선 불출마를 선언한 뒤 나와 차량에 탑승하고 있다. 지난달 12일 유엔 사무총장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며 대선 출마 뜻을 밝힌 지 20여 일 만이다. [뉴시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1일 오후 3시26분 국회 정론관 기자회견장에서 미리 인쇄해 온 원고를 꺼내 읽을 때만 해도 거의 모든 국회 출입 기자는 ‘빅 뉴스’를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3분여 뒤 그의 입에서 “제가 주도하여 정치 교체를 이루고, 국가 통합을 이루려 했던 순수한 뜻을 접겠다는 결정을 했다”는 발언이 나오자 분위기가 잠시 얼어붙었다. 수행비서도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문을 닫았다. 여기저기서 “불출마하겠다는 거냐”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2분여 뒤 고개를 숙이고 회견장을 나서는 반 전 총장의 주변은 취재진으로 뒤엉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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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출마선언은 말 그대로 전격적이었다. 선거 캠프 종합상황실장으로 거론됐던 권영세 전 의원은 “오늘 12시에 통화했을 때도 (불출마 결심은) 전혀 몰랐다”고 말했다. 반 전 총장의 50년 지기인 정태익 한국외교협회 명예회장도 “완전히 멘붕이다. 전혀 낌새도 몰랐다”고 했다. 반 전 총장은 회견 뒤 서울 마포 사무실에서 20여 명의 캠프 인사에게 “고맙고 미안하다. 혼자서 결정했는데, 여러분과 상의했으면 말렸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너무 순수했다. 정치인들은 단 한 사람도 마음을 비우고 솔직히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더라. 정치가 정말 이런 건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도 했다. 그는 “‘표를 얻으려면 나는 보수 쪽이라고 확실하게 말하라’는 요청을 너무나 많이 들었다. 보수의 소모품이 되라는 이야기인데, 나는 보수이지만 내 양심상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면서 정치권을 원망하는 얘기도 했다고 캠프 관계자들은 전했다. 이날 집 앞에서 기자들과 만난 반 전 총장은 "벽이 높다. 능력의 한계를 느꼈다”고 말했다.

수행비서도 놀란 전격 사퇴, 왜
“벽이 높다, 능력의 한계 느꼈다”
집에 돌아온 반기문 심경 토로
“다른 사람에게 기회주는 게 낫다”
새벽에 유순택 여사와 논의해 결정
캠프 핵심 권영세 “전혀 몰랐다”
50년 지기 정태익도 “완전 멘붕”

반 전 총장은 이날 새벽 불출마를 결심했다고 한다. 그는 "아내(유순택 여사)와 심각하게 논의를 하고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게 낫겠다 결심하게 된 것”이라며 "소박하게 시작해서 소박하게 끝난 것”이라고 했다. 유 여사는 그간 반 전 총장의 대선 출마를 강하게 반대해 왔다.

지지율 안 뜨고 정치자금도 부담된 듯

중도 포기 배경에는 기대에 못 미친 여론조사 결과가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크다.

반 전 총장은 전날 바른정당 김무성 의원과 만났을 때 “대선에 안 나갈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는 취지의 말을 하긴 했지만 외부에 그런 기류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선거 캠프 사무실을 이튿날 국회 앞에 새로 열 예정이었고, 취재진에게 일정 등을 알리는 단체 채팅방을 이날 새로 만들었다. 8일에는 독자 정치 세력화를 뜻하는 ‘국민포럼’을 발족할 예정이었다.

일각에선 알려지지 않은 ‘스모킹 건(결정적 단서)’이 있는 게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본격적인 야권의 네거티브 공세가 시작되기 전에 출마 의사를 접은 것일 수 있다는 의미다. 반 전 총장은 강력 부인했지만 야권은 ‘박연차 23만 달러’ 수수 의혹을 집요하게 제기해 왔고, 가족 등 주변을 뒤지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정치권에선 “유순택 여사의 출마 반대를 그동안은 높은 지지율로 설득해 왔는데, 지지율이 떨어진 데다 가족에 대한 공세가 강화되면서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란 얘기가 나왔다. 반 전 총장은 최근 “주변 사람이 다칠까 봐 걱정”이란 말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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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문제도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란 말이 나온다. 국회 앞 빌딩 사무실은 보통 1년 단위 계약을 요구하는데, 대규모 캠프를 운영하려면 월세와 보증금을 합해 1억원 안팎의 돈이 필요하다. 반 전 총장은 지난달 16일 기자들에게 “샐러리맨(외교관)으로 생활하다 자동차 두 대, 운전수 두 명, 비서도 내가 따로 고용하고 마포 사무실도 내 돈으로 직접 얻었다. 홀로 하려니 금전적인 것부터 빡빡하다”면서 정치자금의 부담을 토로했다.

허진·백민경 기자 bim@joongang.co.kr

*중앙일보 조사연구팀, 1월31일~2월1일 지역ㆍ성ㆍ연령 기준 할당추출법에 따라 전국 만 19세 이상 남녀 1000명(유선 378명, 무선 622명)에게 임의전화걸기(RDD) 방식으로 전화면접조사. 응답률은 23.9%(유선 20%, 무선 27%), 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서 최대 ±3.1%p.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공정심의위원회 홈페이지(www.nesdc.go.kr)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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