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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인터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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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전수진 기자 중앙일보 팀장
전수진 정치부 기자

전수진
정치부 기자

어지간히 억울했나 보다. 지난 25일 오후 8시29분에 공개된 박근혜 대통령의 ‘기습 인터뷰 사건’ 얘기다. 기자회견도 꺼렸던 그 대통령이 맞나 싶을 정도로 전격적 행보였다. 인터뷰를 진행한 정규재 한국경제신문 주필은 “(박 대통령이) 굉장히 힘이 빠져 있어서 제가 좀 딱했다”거나 “여전히 총기는 있으신 분이구나”라며 소감을 전했다. 일국의 대통령이 “여전히 총기는 있다”고 하니, 안도의 한숨이라도 내쉬어야 하는 건지 헷갈리긴 하지만 분명한 건 하나 있다. 직무정지 후에야 대통령의 전격 인터뷰를 접할 수 있게 된 국민이 더 딱하다는 거다.

지난 1일 ‘신년 인사회’라는 의뭉스러운 이름으로 열린 기자간담회 역시 전격적이긴 했다. 하지만 그때보다 목소리엔 힘이 없고 화장이며 의상도 절제된 분위기를 풍겼다. 지난 1일의 순백색 정장은 결백을 주장하는 메시지로도 읽혔지만 이번엔 그런 장치도 없었다. 수더분한 인상을 주는 베이지색 정장 차림에 장신구도 일절 하지 않았다. 초췌하다는 느낌마저 줬다. ‘대통령이 동정심에 호소하려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런 분위기를 연출하려 의도한 게 맞다면, 적어도 대통령 지지층에겐 효과만점이었다. “박 대통령이 얼마나 억울하겠나. 눈물이 흐른다”는 반응이 나왔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대다수의 국민에게 대통령의 인터뷰는 분노를 넘어 슬픔을 느끼게 했다. “난 억울하다”며 계책을 꾀하는 대통령 대신, 의연하고 떳떳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기대하는 건 무리라는 점이 다시금 확인됐기 때문이다.

지금 박 대통령을 보면 자신을 지켜내야겠다는 일종의 결기가 느껴진다. 그런 대통령이 꼭 읽어야 할 책이 있으니, 중국 칭화대 팡차오후이(方朝暉) 교수의 명저 『나를 지켜낸다는 것』이다. 저자는 ‘나를 지켜내는 법’으로 중국 당나라 선승(禪僧)으로 알려진 한산과 습득의 일화를 소개했다.

한산이 물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비방하고 업신여기고 욕하고 비웃고 깔보고 천대하니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습득이 답했다. “참고 양보하고 견디고 따지지 않으면 몇 해 후에는 그들이 그대를 다시 보게 되리라.”

올해 봄이 됐건, 겨울이 됐건 대통령의 임기는 곧 끝난다. 그러나 습득의 말처럼 몇 해가 지나 대통령을 다시 볼 수 있을까. 기습 인터뷰 사건은 그럴 일이 없으리라는 데 쐐기를 박았다. 그래서 더 슬프다. 이 예감이 틀리기를 지금이라도 간절히 바란다.

전수진 정치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