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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만리장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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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나현철
나현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나현철 논설위원

나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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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터키의 소아시아 중남부 코냐 인근에서 인류 최초의 도시 유적 ‘차탈회위크’가 발견됐다. 기원전 6500년께 6000명가량의 초기 농경민이 모여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이한 건 집의 구조다. 네 벽이 다 막혀 있고 지붕에만 환기구를 겸하는 출입구가 뚫려 있다. ‘내 것’과 ‘네 것’을 구분하고 방어하기 유리한 구조다.

이런 벽의 역할은 문명이 발전하면서 마을과 도시로 확장됐다. 아테네는 항구를 보호하기 위해 성벽을 쌓았고 로마제국은 스코틀랜드 야만족의 침입을 막으려 하드리아누스 방벽을 지었다. 하지만 어떤 것도 만리장성에 미치진 못한다.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을 두려워한 중국 왕조들이 세운 벽의 총 길이는 2만㎞를 넘는다. 기원전 3세기 진시황이 옛 조·연·진나라 장성을 연결해 처음 건설했고 6세기 북제, 17세기 명나라가 보강과 확장을 거듭했다. 장성이 지나가는 자리는 농경 북방한계선인 연 강수량 400㎜ 선과 대략 일치한다.

현대사에서 가장 긴 벽은 냉전시대 ‘반파시즘 방어벽(철의 장막)’이다. 50년대부터 소련의 주도로 서구와의 국경지대 7650㎞를 따라 건설됐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5년 만에 1500만 명 이상이 무더기로 서구로 빠져나가자 이를 막기 위해 지어졌다. 한반도의 휴전선처럼 가시철사를 단 이중철조망을 세우고 무인지대를 뒀다. 베를린 같은 도시지역엔 콘크리트 장벽을 건설했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길고 긴 장벽의 역사에 새 장을 추가할 기세다. 지난 25일(현지시간)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건설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3000㎞가 넘는 벽을 멕시코 돈으로 세우겠다고 한다. ‘트럼프의 만리장성’이다. 무형의 장벽도 함께 세워지고 있다. 국경세로 기업을 위협해 미국에 공장을 세우라고 압박한다.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재협상도 밀어붙이고 있다.

트럼프의 폭주가 어디까지일지는 모른다. 하지만 장벽의 역사가 주는 교훈이 하나 있다. 장벽은 두려움의 상징이다. ‘내 것’을 지키려는 방어용으로 쌓였다. 하지만 그것으로 안전이 보장되진 않는다. 소련은 결국 무너졌다. 만리장성은 원, 청에 무력했다. 하드리아누스 방벽은 버려졌다. 성벽이 무너져서가 아니라 내분과 경제적 쇠퇴가 겹쳤기 때문이다. 칭기즈칸은 “어떤 성벽도 그걸 지키는 병사들보다 강하지 않다”고 말했다. 트럼프의 만리장성 위에 서게 될 병사들은 어떤 심정일지 궁금하다.

나현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