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성공 방정식은 버려라, 상식 깨고 새 판을 짜야 할 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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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4호 18면

#1. “지금까지 찾아주신 많은 손님의 두터운 정에 감사드립니다.” 지난해 9월 30일 일본 홋카이도 아사히키와시에 있는 세이부 백화점 직원들이 정문 입구에서 일렬로 서서 마지막 인사를 했다. 41년 간의 영업을 끝내는 폐점 행사였다. 최근 일본 백화점은 실적 부진으로 줄줄이 문을 닫고 있다. 1999년 311개였던 백화점이 최근 230여 개로 줄었다. 최근 2년 새에만 일본 전국에서 11개의 백화점이 폐점을 결정하거나 문을 닫았다.


#2. 지난해 12월 말 도쿄 신주쿠의 대형 할인점 돈키호테. 장난감부터 과자, 롤렉스 시계, 선풍기까지 온갖 물건이 뒤섞인 채 무질서하게 진열돼 있다. 수많은 관광객이 몰리면서 좁다란 통로엔 발 디딜 틈이 없다. 값싼 가격에 독특한 매장 운영 방식으로 일본을 찾는 관광객에겐 반드시 들려야 하는 관광 명소가 됐다. 돈키호테가 인기를 끌면서 1년 새 35곳 매장이 문을 열었다. 현재 돈키호테 전체 매장 수는 341개(2016년 6월 기준)다.


최근 일본에선 전통적인 경영방식을 고수하던 기업은 점차 사라지고, 새로운 방식의 마케팅을 앞세운 기업들이 등장하고 있다. 일본은 1990년부터 시작된 거품 붕괴에다 저출산·고령화로 생산인구 감소까지 겹치면서 ‘잃어버린 20년’을 겪고 있다. 1960년대 일본 제조업의 영업이익률은 매출액의 7.5%에 달했다. 1990년 이후 저성장 시대로 접어들며 3%로 떨어졌고 미국발 금융위기가 발생했던 2008년엔 사상 처음으로 1%대에 그치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기업의 성장이 정체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삼아 고성장을 이어가는 일본 기업들이 나타나고 있다. 바로 발상의 전환으로 기존 업계의 상식을 깨고 산업의 판도를 바꾸는 ‘게임 체인저(game changer)’다. 최근 증권사·벤처캐피탈 등 국내 금융사 전문가들이 이들 기업을 방문하는 횟수가 늘고 있다. 한국의 저성장·저출산·고령화 등 일련의 과제들이 일본이 겪은 장기침체와 닮아가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면서 장기불황을 이겨낸 일본 기업들의 성공 비결에 관심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일본기업 탐방을 다녀온 증권사의 일본담당 전문가 3인이 주목하는 게임 체인저 5개 업체의 성공 전략을 살펴봤다. 이 가운데 돈키호테·니토리·레오팔레스21은 전통적인 업계의 상식을 깨고 성공한 기업들이다.

[정글 진열로 보물찾기 재미 더한 돈키호테]
돈키호테의 전략은 ‘없는 것 없는, 값싼 잡동사니 매장’이다. 일반적으로 유통 기업이 상품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포장한다면 돈키호테는 싼 물건을 더 싸보이게 만드는 데 공을 들인다. 파산한 기업이 덤핑으로 처분하는 상품부터, 반품·B급 상품을 사들여 판매하기 때문에 일반 할인마트보다 약 10~15% 저렴하다. 2009년부터는 자체 브랜드(PB) 상품인 ‘정열가격(情熱價格)’도 내놨다. 이때 선보인 청바지 가격이 690엔(약 7080원)에 불과했다. 값싼 가격은 장기 불황으로 지값이 얇아진 일본 20~30대의 발길을 잡는 데 성공했다.


좁은 공간에 뒤죽박죽 약 4만 개의 물건이 천장까지 쌓여있는 것도 돈키호테의 성공 비결이다. 일본 유통업계의 이단아로 통하는 창업자 야스다 다카오가 돈키호테 전신인 ‘도둑시장’을 직접 운영하면서 개발한 ‘정글 진열’ 방식이다. 고객이 마치 정글 속을 탐험하듯 원하는 물건을 찾는 재미를 맛볼 수 있도록 했다. 산만해 보이는 진열에도 숨겨진 규칙이 있다. 가장 인기있는 상품은 통로 안쪽이나 고객 손이 닿지 않는 선반 위에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상품 옆에는 가격은 더 싸지만 마진이 큰 PB 상품들이 놓여있다.


권재형 하나금융투자 연구원은 “미로 같은 공간으로 고객이 머무는 시간을 최대한 늘려 충동구매를 유도하는 전형적인 시간소비형점포”라고 말했다. 일본에서 드물게 24시간 운영하는 것도 야스다 창업자의 아이디어다. 심야 고객이 낮보다 지갑을 쉽게 여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파악한 뒤 영업전략으로 삼았다. 싼맛과 재미를 더한 독특한 전략은 외국인 관광객도 끌어모으고 있다. 특히 중국인 관광객 한 명의 평균 지출액(2014년 기준)은 약 4만 엔(약 41만원)으로 일본 소비자의 16배 이상이다.

[친절 마케팅으로 이케아 누른 니토리]
니토리는 ‘일본의 이케아’로 불리는 홈퍼니싱(home furnishing) 기업이다. 2001년 일본 가구업계 1위였던 오오츠카 가구를 제쳤고 매장은 430개(2016년 3월 기준)에 이른다. 스웨덴의 가구 공룡인 이케아가 2006년 일본에 진출했지만 니토리 아성을 깨진 못했다. 1967년 창업자 니토리 아키오 회장이 홋카이도 삿포로에서 문 연 동네 가구점이 꾸준하게 성장한 비결은 바로 일본 가구 업계의 상식을 깬 ‘낮은 가격의 홈퍼니싱 기업’으로 변신한 것이다.


아키오 회장이 1970년 초 미국 출장을 갔다가 저렴한 생활 소품을 함께 파는 가구 업체들이 인기를 끄는 것을 본 뒤 사업 전략을 확 바꿨다. 앞으로 일본 경제가 발전할수록 집을 예쁘게 꾸미고 싶어하는 소비자의 욕구가 커질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가구 뿐 아니라 침구·커튼·벽지 등 인테리어 소품까지 판매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며 성장한 니토리에게도 이케아의 일본 진출 소식은 악재였다. 니토리는 가격인하로 맞섰다. 대신 제품의 질을 높이기 위해 디자인부터 생산·유통·판매까지 도맡는 제조·유통 일괄형(SPA) 생산방식을 도입했다. 인력 비용을 낮추기 위해 생산공장은 해외로 옮겼다. 특히 이케아가 ‘불편을 판다’는 것을 마케팅 전략을 내세울 때 니토리는 ‘친절 마케팅’으로 대응했다. 정희석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니토리는 도심 외곽에 창고형 매장을 짓는 이케아와 달리 역세권 중심으로 매장을 열고 배송 서비스도 마련했다”고 말했다.


2015년 니토리 매출액은 4581억엔(약 4조7000억원), 영업이익은 730억엔(약 7500억원)이었다. 2009년 이후 매출액과 영업이익이 연평균 10%씩 성장했다. 일본 도쿄증권거래소에 상장된 니토리의 주가 상승세도 가파르다. 현재 주가(1월 6일 종가기준)는 1만3530엔(약 13만8000원)으로 4년 새 326%나 올랐다.

[건설업에서 주택임대로 변신한 레오팔레스21]
국내 부동산 전문가들이 향후 부동산 대책으로 뉴스테이(기업형 임대주택)를 얘기할 때마다 성공 사례로 꼽는 기업이 일본의 레오팔레스21이다. 아파트 건설사였던 이 회사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아파트 건설을 접고 주택임대 중심으로 사업을 재편하면서 재기했다. 특히 부동산 개발업자가 건물(땅)을 통째로 빌린 후 이를 재임대해 수익을 얻는 마스터 리스(Master lease) 방식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일본은 1990년 초 거품경제 붕괴 이후 주택을 비롯해 부동산 가격이 줄곧 하락했다. 따라서 연간 일정 수익(이자)만 보장한다면 장기간 땅이나 건물을 빌려서 임대사업을 할 수 있다. 여기서 나오는 임대수입은 건물주와 분배한다.


레오팔레스21은 대도시의 1인 가구에 초점을 맞춰 소형주택 임대사업을 펼친 게 성공 비결이다. 일반적으로 46㎡(14평) 규모의 방에 TV부터 냉장고·에어컨·세탁기 등 모든 가전제품을 갖춰 놓았다. 세입자는 몸만 들어가면 된다. 권재형 연구원은 “최근 도쿄 지역의 1인 가구수만 268만 가구로 10년 전보다 10% 가까이 증가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도쿄와 같은 대도시는 1인 가구가 빠르게 늘면서 가구까지 모두 갖춘 소형 임대주택이 인기가 많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현재 일본의 1700만 임대주택 중 약 55만 채를 레오팔레스21이 관리하고 있다. 2012년 말 한국에 진출해 공동주택 시설관리 업체인 우리관리와 손잡고 합작사인 우리레오PMC를 설립했다.

[맞춤형 서비스 선보인 에스엠에스와 엠쓰리]
2000년 초반에 등장한 에스엠에스와 엠쓰리는 정보기술(IT)을 활용한 게임 체인저다. 에스엠에스는 일본의 심각한 인구 고령화를 사업 기회로 삼았다. 간병이나 간호에 특화된 인력을 소개하는 일이 주요 업무다. 최근 일본에선 간병산업이 뜨면서 이온그룹·파나소닉 등 대기업들이 잇따라 진출하고 있다. 김보근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일본 정부는 현재 3461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27%에 달하는 65세 이상의 고령자가 75세를 넘기는 2025년엔 38만 명의 간병 인력이 부족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며 “간병산업은 지속적으로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에스엠에스는 2014년 간병관련 기업들의 경영 지원 서비스로 사업을 확대하면서 수익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현재 주가(1월 6일 종가 기준)는 2665엔(2만7350원)으로 2013년 초 대비 492% 올랐다. 같은 기간 게임 체인저로 뽑은 5개 기업 중 주가 상승률이 가장 높다. 김 연구원은 “에스엠에스는 발빠르게 한국을 비롯해 싱가포르·중국 등지 170만 명 회원을 보유한 의료정보서비스 기업 미디카아시아를 2015년에 인수했다”며 “향후 아시아 시장을 진출할 경우 주가는 더 오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엠쓰리는 IT로 제약업계의 오랜 관행을 깬 기업이다. 과거 제약사들은 병원에 더 많은 약품을 납품하기 위해 출혈 경쟁을 일삼았고 불법적인 접대·리베이트 등으로 사회적 문제를 일으켰다. 그동안 대면으로만 이뤄졌던 제약영업 활동을 인터넷 플랫폼으로 옮겨온 기업이 엠쓰리다. 약품 영업이 비대면으로 바뀌면서 제약사는 영업활동에 들어가는 비용을 줄이고, 병원 의사들은 의약품에 대한 정보와 의견을 실시간으로 받아 윈윈하는 효과를 얻었다. 엠쓰리가 2003년에 설립된 의료정보 사이트(m3.com)엔 현재 일본의사의 80%인 20만 명이 이용하고 있다.


염지현 기자 yj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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