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학용품도…옷도…「외래어 상표」홍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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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난 19일하오. 서울J국교6학년5반 교실에서 학용품검사를 하던 담임 정교사(37·여)는 평소에는 그냥 지나쳤던 사실을 새롭게 발견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필통· 책받침·지우개·연필·샤프·자·가위등 모든 어린이 학용품이 뜻도 모를 괴상한 외국어 투성이다.
『외국상품의 글자까지 본 뜬것들로 교실이 온통 외국어천국이었어요. 게다가 그 영어단어들은 정확한 것 같지도 않고, 한글은 아예 없거나 눈에 띄지 않게 숨어있어요』 외국제품의 상표를 그대로 복사해놓거나 여기저기서 따온 조각들을 모아 이름을 만들어 놓고 있다.
「Design Club」「Creative Company」「Parmalat」「Joyful Trio」「점보」…필통의 이름이다. 뜻도없는 것조차 있다. 책받침은 더 요란하다. 「Exec」「Lucan」「Street Afternoon」「Minky」등 외국어린이의 모습이나 TV만화영화가 그려져 있다. 마음먹고 찾아보려 해도 한국그림은 보이지 않는다.
지우개조차 「Real life」「New life man」「Little Tommy」등 모호한 뜻의 외국어 투성이였고 꽃이 그려진 자에도 「London Story」「Good Taste」등의 상표가 인쇄돼 있었다.
연필은 비교적 형편이 좋아「별초롱」 「산울림」 등 아름다운 우리말이 많았지만 「째즈맨」「스터디」등이 역시 눈에 띄었고 샤프는 「Hellod Rebbit」「Get Along」등 영어일색.
『그러고보니 문제는 학용품에 그치지 않았어요. 어린이들의 가방·신발·셔츠, 심지어 양말에까지 무의미한 영어단어가 침식돼 있었읍니다. 무분별한 성인문화의 외국어홍수에 어린이들이 몸살을 앓고 있는 셈이지요』 가방은 절반이상이 아디다스· 나이키· 액티브·미즈노·유니버설등 큼직하게 영어로 인쇄된 것을 가지고 있었고 신발은 대부분이 월드컵· 프로스펙스·아티스· 르까프등 뜻도 모를 상표를 달고 있었다.
학급에서 7명이 가슴에「Seemanship」「Soccer Club」등 외국어가 인쇄된 셔츠를 입고 있었고 양말에도 「Excel」등 영어상표가 붙어 있었다.
정교사는 이날 퇴근길에 학교앞 장난감가게에 들러보았다.
마크로스·이로코이스· 슬링숏·쉐이키· 실버볼트· 오르가스· 칸담등 엉뚱한 외국어 대행진에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이어 과자가게. 역시 그레이스· 다이제스트·하비스트·포테이토 칩·조안나· 조스바·뉴후레쉬민트 껌등 과자·빙과류의 80%이상이 외국어 이름을 걸고 자랑스레 진열되어 있었다.
『TV 만화영화도 외국어에 오염되어 있읍니다. 제목부터가 슈퍼보이·메칸더V등 인데다 콩키스터군단· 로코·고스터· 마르크· 미나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지요』 서울K국교 이교사(40·남)는 외국어투성이의 학용품·옷·장난감·과자등에 둘러싸여 사는 우리어린이의 모습을 외국인들이 보면 어떻게 생각할지 부끄러음이 앞선다고 했다.
이 교사는 지난 20일 6학년 학급회의시간에 「외국어와 국어사랑」 이라는 주제로 토론을 지켜보았다.
주변의 외국어 홍수사태에 대한 어린이들의 여러가지견이 쏟아져 나왔다.
『학용품·과자등에있는 어려운 외국어를 보면 뜻을 알수 없어 답답합니다』『어른들은 영어를 좋아하지만 어린이들만은 고운 우리말을 써야합니다』의 『만화영화에 나오는 사람 이름을 한글로 바꾸어주면 좋겠어요』『우선 스케치북부터 그림공책이라고 부르는게 어떨까요』 (박수) 반대의견도 나왔다.
『그렇지만 외국어가 씌어져있으면 멋있어 보이는게 사실입니다]『영어공부도 할 수 있으니까 외국어가 많다고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향은 어린이들의 언어에도 번져 주식회사 계몽사가 어린이 1천1백54명을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빵꾸·핸드백·오르간이란 말을 써본 어린이가 전체의 70%를 넘었고 스톱·후라쉬·벨트·벤또와 같은 말은 60%이상이 사용한 경험이 있다.『이같은 현상은 외국어 좋아하는 잘못된 성인문화와 상혼탓입니다. 어린이용품에라도「방울」「눈보라」등 고운 우리말을 사용하도록 사회적 각성과 운동이 있어야할 것입니다. 무의식중에 한글과 우리것을 얕보는 마음가짐이 굳어져가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정·이교사는 대중매체는 물론 학용품업자들의 각성을 촉구하며 이 문제는 어린이에 대한 영어조기 교육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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