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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여성 감독의 영화는 흥행 안 된다? 그런 편견을 깨고 싶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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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박현진·이경미·윤가은 감독

(왼쪽부터) 박현진·이경미·윤가은 감독

2016년 개봉한 한국영화 327편 중 여성 감독이 만든 상업영화는 단 9편. 다양성 영화까지 합치면 30편 정도다(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12월 26일 기준). 한국에서 여성 감독은 여전히 소수다. 하지만 그들이 만든 영화는 올해 한국영화의 결을 보다 풍성하게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자식 잃은 여성의 절규를 색다르게 풀어낸 ‘비밀은 없다’, 연상의 여성 드라마 작가와 연하인 남성 톱스타의 ‘쿨’한 사랑 이야기가 돋보였던 ‘좋아해줘’, 열한 살 소녀들의 복잡 미묘한 세계를 섬세하게 그린 ‘우리들’ 등등. 한국영화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여성 캐릭터 그리고 여성 감독이 많다는 사실을 이 영화들은 다시 한 번 일깨웠다. 그 깨달음은 한국영화에 어떤 변화를 몰고 올 수 있을까. 앞서 언급한 영화를 각각 연출한 이경미(43)·박현진(39)·윤가은(34) 감독과 한 해의 끝자락에 다시 만났다. 그들이 허심탄회하게 들려준 각자의 경험과 고민, 다양한 바람을 여기 적는다.

[ 여성 감독의 영화, 그 성과 ]

윤가은 감독(이하 윤 감독) “여성 감독이 연출한 영화의 내용이 더욱 풍부해진 한 해였던 것 같다. 솔직하고 대담하며 다양한 여성 캐릭터가 더욱 많아졌다. 예전에도 그런 시도들이 있었지만, 비로소 ‘아, 진짜 여자 이야기를 하는구나, 한국영화가 이렇게 솔직해지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해방감 같은 걸 느꼈다고 할까.”

이경미·박현진·윤가은 감독의 대담

이경미 감독(이하 이 감독) “여성이 주인공인 묵직한 스릴러를 보고 싶다는 생각에, 처음부터 ‘비밀은 없다’의 장르를 스릴러로 정하고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개봉할 때가 되어 보니 ‘미씽’도 있고, 여성 감독이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인 스릴러를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그렇게 특별한 일이 아니더라. 여성 감독의 영화가 장르적으로 다양해지고 있는 것 같다.”

박현진 감독(이하 박 감독) “맞다. 여성 감독의 스릴러를 한 해에 두 편이나 보다니, 인상적이다.”

이 감독 “‘비밀은 없다’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주인공 연홍을 ‘엄마답지 않은 엄마’로 그리기로 마음먹었다. 기존 한국영화에서 보지 못한 엄마 말이다. 그 점에 호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예상했기에, 더더욱 ‘흥행에 성공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다. ‘이런 여성 캐릭터를 그리면 흥행이 안 된다’는 선례를 남길까 두려웠다. 결과적으로는 바로 그런 여성 캐릭터를 선보였기 때문에 지지와 반대를 동시에 얻었다고 생각한다. 흥행 실패에 대해서는 마음이 안 좋다.”

비밀은 없다

비밀은 없다

박 감독 규모 면에서 보자면, 올해 여성 감독의 영화가 큰 흥행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여성 감독의 영화는 흥행이 안 된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여성 감독이 연출하는 영화 중 소위 ‘큰 영화’, 예산이 크고 티켓 파워가 큰 배우들이 출연하는 작품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다양성 영화인 ‘우리들’이 장기 상영으로 관객 약 5만 명(상영 중)을 모으고, ‘미씽’이 115만 명(상영 중) 넘는 관객 수를 기록한 것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윤 감독 “‘좋아해줘’는 여자들 가려운 데를 긁어 주는 로맨틱 코미디였다. 극 중 잘나가는 TV 드라마 작가 경아(이미연)의 ‘뒷담화’를 하는 사람들에게 톱스타 진우(유아인)가 그러지 않나. ‘여자가 나서면 기 세고, 남자가 나서면 할 말 다하는 거냐. 이 촌스러운 인간들아!’ 그 순간, 그가 ‘여자들이 바라는 남자다!’ 싶었다(웃음).”

이 감독 “난 ‘좋아해줘’에서 안 그런 척하며 은근슬쩍 자상하게 챙겨 주는 성찬(김주혁)이 좋던데. 내 이상형이랄까(웃음). ‘좋아해줘’의 경아·진우·성찬이나 ‘비밀은 없다’의 연홍처럼 새로운 캐릭터를 받아들이느냐 아니냐는 꼭 성별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연홍을 부담스럽게 느낀 여성도 많았다. 딸이 없어져서 실성한 연홍이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딸의 학교에 찾아가는 모습 등이 ‘과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결국 기존의 성 관념에 얼마나 익숙해져 있느냐 아니냐의 차이다.”

윤 감독 “관객을 포함한 우리 모두가 과도기를 지나는 느낌이다. 한국영화에 이전에 본 적 없던 입체적인 여성 캐릭터가 하나둘 등장하는데, 처음이다 보니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느낌이랄까.”

이 감독 “‘여성 감독이 선보이는 살아 있는 여성 캐릭터’가 더 이상 새로운 일처럼 느껴지지 않으려면, 여성 감독의 수가 적어도 전체의 30%는 돼야 할 것 같다. 그래야 감독의 성별에 상관없이, 오로지 작품의 내용만으로 이야기하는 시대가 열리지 않을까.”

박 감독 “맞다. ‘여성 감독이 연출하는 영화는 흥행하지 못한다’는 편견을 없애기 위해서도 지금보다는 절대적으로 수가 늘어야 한다.”

[ 입체적인 여성 캐릭터가 필요하다 ]

윤 감독 해외 영화제에 가면 ‘대부분의 한국영화는 왜 여성 캐릭터를 폭력적이고 잔인하게 대하느냐’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이 감독 “나도 해외 영화제에 갔을 때 ‘유럽인들이 한국영화를 흥미로워하는 건, 자신들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폭력성과 기괴함을 보여 주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우리의 일상이 그들 눈에는 너무 충격적이기에 오히려 예술적으로 느껴지는 거지. 예를 들어 한국영화나 TV 드라마는 남자가 여자를 벽에 밀쳐 강제로 키스하는 모습을 섹시하고 낭만적으로 그리는데, 다른 문화권에서는 다분히 폭력적으로 비치는 것처럼.”

좋아해줘

좋아해줘

박 감독 “‘여성 수난극’이라 할 만한 한국영화가 해외에서 각광받기도 하니까. 꼭 그런 영화가 아니라도 섹스신이나 여성의 몸을 드러내는 장면이 유독 ‘보여 주기식’일 때 불편하다.”

이 감독 “똑같은 여성의 몸이라도 그 장면을 통해 한국 사회의 폭력성을 진지하게 고발하거나 여성의 몸이 지닌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호객의 목적이 분명한 연출은 정말 불편하다. 하나 더, 여기저기서 실수를 저질러 일을 꼬이게 만드는 여성 캐릭터가 나오는 것까지는 괜찮다. 그걸 매력적이거나 사랑스럽게 묘사하는 건 짜증난다.”

박 감독 “미묘한 게,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모든 면에서 완벽한 여성 캐릭터 말이다. ‘미씽’의 워킹맘 지선을 그 판타지에 대입하면, 아무리 직장 일로 바쁘고 힘들어도 아이는 직접 기르고, 완벽한 엄마가 돼야 하는 거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모두 불완전한 존재고, 착한 이나 못된 이도 있는 것 아닌가. 그런 점에서 여성 캐릭터의 다양한 면을 보여 주고, 다채로운 여성 캐릭터를 등장시키고 싶다. 한데 내가 연출하는 영화에 여성 캐릭터가 아주 많지 않다면, 여성 감독으로서 비열하거나 속물 같은 여성 캐릭터를 그리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일종의 자기 검열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윤 감독 “여성 감독이라면 누구나 그런 책임감, 좋은 의미의 강박 혹은 괴로운 숙제를 껴안은 기분일 거다. 난 소녀 캐릭터를 기능적으로 소비한 영화들을 보면 화가 난다. ‘우리들’의 시나리오를 쓰면서 그런 영화들과 달리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개척해 가는 소녀를 입체적으로 그리자’고 마음먹었다. 그런 존재가 느끼는 욕망은 정말 다양할 텐데, 그것을 표현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건강한 소녀를 보여 줄 수 있을까’ 정말 많이 고민했다.”

이 감독 “난 ‘여성 감독이라 남성 캐릭터를 기능적으로 활용했다’는 말은 진짜 듣기 싫다. 그게 내 강박인 것 같다.”

[ 여성 감독으로 산다는 것은 ]

이 감독 “‘비밀은 없다’가 흥행에 실패한 뒤로 대혼란의 시기를 겪었다. 한국 영화계의 통념처럼 ‘네가 여성 감독이기 때문에 흥행 측면에서 신뢰를 얻지 못했고, 그래서 스크린 수가 빨리 줄었다’는 이야기를 주변에서 했다. 진지하게 고민해 봤다. 가만 보면 영화 예고편에 내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그건 내 전작 ‘미쓰 홍당무’(2008)가 흥행에 성공하지 않았고, 8년 전 작품이기 때문이라 이해할 수 있다. ‘비밀은 없다’는 개봉 전 감독 이름은 물론, 영화에 대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진행하는 모니터링 시사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 그러니 ‘감독이 여자라 흥행 측면에서 제대로 지원받지 못했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거꾸로 난 내가 여성이라 얻은 게 더 많은 것 같다. 단편을 만들 때부터 여성으로서 나만의 시각이 드러나는 작품을 만들었고, 그래서 주목받았고, 그걸 밀어붙여 여기까지 왔으니까.”

우리들

우리들

윤 감독 “‘우리들’을 완성하기까지 3년 걸렸다. 그 과정에서 어떤 불이익을 당했는데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 될 때,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처럼 ‘내가 여성이라 그런가? 어려서 그런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청난 자괴감과 함께. 그 상황을 극복하는 과정에서도 강박이 찾아왔다. ‘나 때문에 다른 여성 감독들 욕먹게 하면 안 돼’란 생각. 그래서 나도 모르게 최대한 세련되게 화내려 마구 머리를 굴리고 있더라. 내 또래의 남성 신인 감독들도 똑같은 상황에서 이런 생각을 할까?

이 감독 “맞다. 촬영장에서 화내기 전에 혼자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정말 많이 한다. ‘어떻게 하면 가장 효과적으로 화낼 수 있을까’ 하고. 한국 여성 감독들, 나중에 몸에서 다 사리 나올 거야(웃음).”

박 감독 “난 촬영 시작할 때부터 원래 직설적인 사람인 척했다. 그래야 필요할 때 ‘여성이라 히스테리 부린다’는 소리 안 듣고 할 말을 할 수 있으니까.”

윤 감독 “이건 사실 우리가 ‘여성 감독’이라기보다,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이기 때문에 느끼는 어려움인 듯하다.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여성들도 이런 고민은 누구나 할 테니.”

박 감독 “한국 영화계, 특히 상업영화계는 아직까지 확실히 남성 중심적이다. 남성 감독·스태프 중심으로 일해 오다 보니 여성 감독·스태프와 작업하는 게 낯선 것이다. 제작사 리양필름주식회사 이한승 대표님은 그런 틀에 갇히지 않았기 때문에 ‘좋아해줘’의 연출을 내게 맡겼다고 생각한다. 이런 제작자들이 많아져야 한다.”

이 감독 “‘미쓰 홍당무’의 공동 각본과 투자를 맡아 나를 데뷔시켜 준 박찬욱 감독님 역시 그런 분이라 할 수 있다. 특히나 제작사 명필름 심재명 대표님처럼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여성 리더가 있다는 사실이 후배 영화인으로서 든든하게 느껴진다.”

윤 감독 “그분의 존재 자체가 후배 영화인들에게 메시지가 되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우리들’ 제작사 아토의 김지혜, 제정주, 이진희 프로듀서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내가 ‘여성’ 감독으로서 차별이나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여러 면에서 신경 써 준 사람들이다.”

[ 변화를 마주한 한국 영화계 ]

박 감독 “올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 성차별 이슈들을 접하며, 나부터 감독으로서 인권 감수성을 키워야겠다고 생각했다. 한국 영화계가 그동안 그에 대해 너무 무뎠던 게 사실이다.”

윤 감독 “‘걷기왕’ 남순아 스크립터의 제안으로 제작 스태프 전체가 성희롱 예방 교육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반성을 많이 했다. 나도 그런 책임감을 가져야겠다고 다짐했다. 촬영장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책임은 최종적으로 감독인 내게 있으니까.”

박 감독 난 충무로든 할리우드든 여성 감독이 만든 블록버스터를 보고 싶다. 똑같은 재난영화, 수퍼 히어로 영화라도 여성 감독이 만들면 이야기의 결이 달라질 것 같다. 어떤 영화가 나올지 정말 궁금하다.

이 감독 “만약 내가 그런 규모의 영화를 찍을 수 있다면, 소녀가 주인공인 액션영화를 연출해 보고 싶다. 지금의 한국 영화계에서는 투자받기에 최악의 조건이라 할 것이다.”

박 감독 “후배 여성 영화인들에게 무엇보다, 이 과도기가 안겨 준 수많은 측면의 이중 검열에서 자유로워지라고 말하고 싶다. 무슨 소리를 듣지는 않을까 고민하지 말고 용감하게 자신의 방식대로 헤쳐 나가라고.”

이 감독 “맞다. 혼란의 시기다. 정답을 얘기해 주고 싶은데, 거짓말은 못하겠다(웃음). 다 같이 정답을 찾아갈 수밖에 없다.”

장성란·이지영·고석희 기자 hairpin@joongang.co.kr 사진=전소윤(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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