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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알겠니? 사랑에도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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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6호 22면

일러스트 김옥

2014년, 영화 ‘비포 미드나잇’이 상영되던 어떤 심야의 극장 안에는 여섯 관객이 있었다. 그중 커플로 보이는 넷은 내 앞에 앉았다. 영화가 시작되자 곧 그리스 메시니아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 잘 알려졌다시피,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비포’시리즈(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 비포 미드나잇)는 18년의 시간에 걸쳐 우리에게 도시를 체험하는 특별한 감각을 선물했다. 나는 그것이 느리게 걷는 속도로 본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대학 시절 본 ‘비포 선라이즈’에서 오스트리아 빈의 모습이, 직장인이 된 후 보게 된 ‘비포 선셋’에서는 파리 셰익스피어 서점 주변의 풍경이 그렇게 그려졌다.


심야극장에 온 연인들은 팔을 두른 다정한 모습이었다. ‘비포 미드나잇’에서 그들이 기대한 것 역시 낭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18년간 ‘비포 시리즈’를 해온 제시와 셀린느의 역할에는 변화가 생겼다. 안타깝게 헤어졌던 연인에서 전처에게서 낳은 아들과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쌍둥이 딸을 둔 부부로 말이다. 이들 부부가 그리스에서 만난 다양한 커플과의 식사 자리에서 나눈 대화는 그러므로 사랑의 낭만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화는 돌아가신 할머니가 손녀에게 남긴 26쪽이나 되는 편지에 관한 이야기였다. “편지에 할아버지에 대한 글은 딱 세 줄뿐이었어요. 또 할머니는 제게 이렇게 충고하셨어요. 로맨틱한 사랑에 목매지 말라고. 당신은 우정과 일로 인해 진정 행복하셨다고.”


낭만적인 사랑이 호르몬의 농간일 수 있다는 말은 내게 전혀 새삼스럽지 않았다. 하지만 내 앞에 있던 커플은 결국 문을 박차듯 극장 밖으로 나가버렸다. 곧이어 다른 커플 역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몇 분 간격을 두고 200석이 넘는 넓은 극장에 관객이라고는 나와 그밖에 남지 않았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극장 안에서 맘에 드는 대사를 적기 위해 펜 대신 휴대전화를 쓴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텅 빈 심야극장에서 영화 상영 중 스크린을 찍는 기행을 저질렀다.


“젊은 남자애들은 늘 자신을 비교하지…랭보는 열일곱 살 때 뭘 읽었고, 피츠제럴드는, 발자크는 뭘 썼는데 난 뭐지? 여자는 안 그래. 우린 비교를 덜 하고 살아. 뭔가를 이룬 여자들은 50대는 되어야 하거든. 그 전에 인정받기 힘들어! 30년간 애들 키우느라 집에 묶여 있다가 나가니까…우린 (남자들처럼) 다른 사람하고 비교 같은 거 안 해. 마틴 루터 킹이나 간디, 톨스토이하고!”


사랑에서 결혼으로, 환상에서 현실로개인적으로 파리지앵에 대해 떠올리면, 프렌치 시크나 낭만 같은 단어보다 과장과 수다가 먼저 떠오른다. 파리지앵을 상징하는 ‘나는 전부 다 맘에 안 든다! 왜냐하면 나는 파리지앵이거든!’ 같은 말도 연상 작용처럼 떠오르고 말이다. 우디 앨런의 영화 속 뉴요커들이 온갖 강박증에 시달리며 정신과 상담을 받느라 돈을 탕진하는 사람들이라면, 내게 파리지앵들은 불평과 불만이 많은 부류다. 쉬지 않고 말하는 셀린느 역시 매력적이지만 대단한 독설가다. “당신 책 본 사람들은 내가 헨리 밀러랑 사는 줄 알아. 잠자리에서 당신 엄청 지루한대!”


이들은 이전처럼 대화하며 도시 여기저기를 걷는다. 하지만 호텔 숙박권을 사용하기 위해 메시니아 섬을 걸으며 이들이 나누는 대화는 낭만과는 거리가 한참 먼 헌신, 양육, 노력, 균형에 대한 것들이다.


사실 연애와 결혼은 다른 종류의 체험이다. 아이까지 낳게 되면 상대편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먼 사람이 되어버린다. 우리는 종종 그것을 결혼이라 읽고, 현실이라고 적는다.


‘비포 미드나잇’은 소설가가 된 제시가 자신의 가족들을 데리고 7주의 꿈같은 레지던스 생활을 보내고 난 이후의 이야기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올리브 나무 사이를 건너며 나누는 제시와 셀린느의 대화는 이전처럼 아름다운 섹스 신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그들은 호텔에서 사랑을 나누는 대신 서로를 향한 비난을 멈추지 못한다. 내가 너를 사랑했기 때문에 버려야 했던 무수한 시간과 기회에 대한 대화는 결국 서로를 향해 찌르는 칼처럼 마음을 난도질한다. 가령 셀린느와 결혼하기 위해 이혼한 제시가 히스테릭한 전처에게서 아들을 데려오지 못해 답답해하며 북 투어를 하는 동안, 셀린느는 콘돔 없이 한 첫 섹스에서 임신한 쌍둥이를 키우며 엄마라는 낯선 역할로 버거웠던 자신의 마음을 절규하듯 토로한다.


“안녕, 북 투어 아저씨. 당신 워싱턴 북 투어 때, 때마침 핸드폰도 고장나 주시고. 서점 직원, 에밀리랑 안 잤다고 맹세해 봐.”


“난 당신한테 내 인생을 통째로 줬어! 더 줄 게 없다고!”


“에밀리랑 잤어?”


“당신 질문이 당신과 애들, 우리 삶에 충실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절대 아니야.”


“빌어먹을, 그 년이랑 잤구나! 눈물나게 고맙네!”


이들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각자의 말을 한다. 결국 셀린느의 입에서 나온 결론은 “나는 당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라는 말이다. 그녀는 선언하듯 말하고, 호텔 방문을 박차고 나간다. 마치 극장 밖을 나가버린 두 커플들처럼.


사랑했던 기억을 복원하는 능력에 대하여영화가 끝나자 정신 차리라는 듯 곧 불이 켜졌다. 붉은 카펫이 깔린 극장 안은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붉은 방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나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스크린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아무도 없는 극장에서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비포 시리즈’를 보는 일은 다시 일어날 것 같지 않아서 그랬다. 하지만 엔딩 크레딧에서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의 이름을 발견한 순간, 극장 밖을 나가버린 두 커플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이 내가 ‘심야극장’이란 제목의 칼럼을 쓰게 된 계기였다.


영화의 마지막, 제시는 뛰쳐나간 셀린느를 찾아 호텔 밖으로 나온다. 그는 미래에서 온 ‘시간 여행자’가 되어 홀로 앉아 있는 그녀에게 말을 건다. 그리고 수십 년의 시간이 흘러도 당신은 여전히 사랑스럽고 엉덩이는 빵빵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좋았던 시절로 되돌리려는 게 아니라, 진짜 사랑이라면 노력해야 한다는 말도 한다. 나는 늙수그레해진 제시의 얼굴을 보다가, 지금 그가 하려는 일이 어떤 것인지 ‘명백히’이해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게 진짜 삶이야. 이게 진짜 삶이야!”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안간힘이 어떻게 사랑일 수 있느냐고. 이미 끝난 관계라면 청산하는 게 낫다고.


하지만 모든 게 빠르고 쉽게 바뀌는 문화에서 사랑했던 기억을 복원해내는 능력이 얼마나 희귀하고 아름다운가를 나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나는 시작하는 커플이 아니라, 끝나가는 사람들의 안간힘이 더 마음에 와 닿는다고. 그들이 추억을 소환해 현재의 결핍을 메우려 발버둥치는 순간, 눈에 보이지 않지만 변화가 시작된다는 걸 진심으로 믿고 싶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들도 안 것이다. 이젠 두 눈을 부릅뜨고 절망으로 희망을 말하는 순서에 대해서도 배워야 한다는 걸.


결국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것이었다. 앞서 극장을 나간 두 커플이 봐야 할 결정적 5분은 이 엔딩 안에 있었다고. 당장 이해하긴 힘들었겠지만, 어느 날 문득 이 지독한 역설을 이해하게 될 서늘한 밤을 위해서라도. 극장을 나오면서, 나는 9년 후, 이 영화의 마지막 편이 나오리라 예감했다. 그 영화의 제목이 ‘비포 던’(before dawn)이든 무엇이든 간에. ●


백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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