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컴 투 ‘상실의 세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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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6호 29면

영화 ‘환상의 빛’

“사실 이 영화는 ‘미쓰 홍당무’의 인간 구도를 현미경의 다른 쪽으로 봤을 뿐인 이야기에요.” 지난달 14일 영화 ‘비밀은 없다’의 언론 시사회에서 이경미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사진 혹은 동영상을 매개로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인물이 여교사 양미숙에서 정치인의 아내 연홍으로 바뀌었을 뿐 사건을 좇는 본질은 같다는 얘기다.


사실 영화의 본질도 마찬가지다. 감독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굉장히 다양한 것 같지만 기본적인 메시지는 동일하다. 추격 스릴러를 표방하는 ‘사냥’을 보면서 ‘최종병기 활’이나 ‘끝까지 간다’가 떠오르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활이 총으로 바뀌고 도심은 산으로 변했지만 같은 제작진이 만든 영화에서 그들이 지닌 서사의 가장 근본적인 틀이 바뀔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올라선 감독의 데뷔작을 보는 것은 그런 지점에서 매우 즐거운 일이다. 이 감독이 그동안 만들어 온 이야기에 대한 예고편을 미리 보는 기분이요, 향후 변형될 이야기의 원형을 만날 수 있는 신기한 경험인 까닭이다. 7일 개봉을 앞둔은 그래서 여러 모로 흥미롭다. 무려 20년 전인 1995년 작품이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是枝裕和·54) 월드를 구축하는 전형이 모두 담겨있다.


우선 다큐멘터리를 만들던 감독은 빛과 소리를 자유자재로 사용한다. 자전거 열쇠에 달려 있는 방울 소리나 차를 따르는 물 소리 등 생활 속에서 등장하는 사소한 소리 하나마다 명확한 임무를 부여한다. 덕분에 그 자체로 추억을 환기하는 소재가 되거나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는 역할을 멋지게 수행해낸다. 빛 역시 마찬가지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빛이 감돌지만 온기를 더했기에 음침하거나 우울한 느낌을 주진 않는다.


이는 감독이 인물을 바라보는 관점과도 상통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어떤 형태로든 상실을 경험한다. ‘아무도 모른다’(2004)에서는 네 명의 아이들이 엄마에게 버림받고 차례로 죽어가고,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에서는 15년 전 세 딸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가 자매들 앞에 이복 여동생을 남겨 놓은 채 세상을 떠난다.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 사라지는 일은 커다란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이를 요란스럽게 그리지 않는다. 그것이 엄청난 인과관계를 필요로 하는 일이기 보다는 누구나 언제든 겪을 수 있는 일이라 믿기 때문이다.


‘환상의 빛’에서 역시 여자는 남자를 먼저 떠나보낸다. 자살로 추정되지만 도저히 그럴 만한 이유를 찾지 못했기에 문득 문득 떠오르는 남자의 잔상은 그녀의 일상을 깊숙이 파고든다. 하지만 현실이 그렇듯 누군가 떠나도 삶은 계속된다. 여자는 재혼을 하고 새로운 가정을 꾸린다. 그러는 사이 생후 3개월 갓난아기였던 아들은 어느덧 7살이 되어 누나와 할아버지가 생겼다. 허나 이를 낯설어하지 않고 또다른 형태의 가족으로 살아가는 법을 자연스레 배운다. 마치 원래 그렇게 살아왔던 듯 말이다.


무채색 세상이 점차 색을 찾아가는 것도 이 때부터다. 검은 옷을 벗고 흰 옷을 입는다거나 창문을 통해 빛이 한 가득 들어오면서 삶도 조금씩 생기를 띄기 시작한다. 어쩌면 감독은 처음부터 그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신생아가 뒤바뀌고 유기되는 세상에서 누군가는 자의 혹은 타의로 세상을 떠나지만, 남은 이들은 함께 의지하며 굳건히 살아가야 한다고 말이다. 그렇게 걷고 또 걷다 보면 진짜로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마침 감독의 최신작인 ‘태풍이 지나가고’도 이달 말 개봉을 앞두고 있다. 유별나지 않은 담담한 위로가 필요하다면, 바닷마을 풍광 속에서 서서히 볕을 쬐고 싶다면, 지금이 바로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만날 때다. 데뷔작부터 최신작까지 닮은 듯 다른 인물들이 나와 그 상처를 보듬어 줄 것이라 기대해도 좋다.


글 민경원 기자, 사진 씨네룩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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