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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부인이 직접 인테리어, 전통 목재 장식문 ‘겝욕’ 눈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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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4호 26면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도동에 위치한 주한 인도네시아 대사관저에 설치된 ‘겝욕(gebyok)’은 자바섬의 정교한 목각기술을 상징하는 장식문이다. 리셉션이 열리면 대사 부부는 귀빈들과 이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다고 했다.

주한 인도네시아 대사관저는 대사관저들 중 유일하게 서울 여의도에 있다. 넓은 부지에 자리 잡은 대사관저의 내부 분위기는 마치 갤러리 같았다. 크림색과 옅은 회색의 소파, 의자들은 심플하고 모던한 느낌을 줬다. 벽에는 강렬한 색채의 현대 미술작품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일부 한국 분들은 인도네시아 하면 옛 문화만 떠올리는데,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드리기 위해 현대미술을 적극 전시하고 있어요.” 알렉산드리아 프라세티오 주한 인도네시아 대사 부인은 대사관저의 인테리어 콘셉트를 이렇게 설명했다. 전문 큐레이터 못지 않은 감각을 자랑하는 그는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에서 건축 디자인 회사의 CEO를 지금도 겸직하고 있다. 2012년 남편 따라 한국 땅을 처음 밟았을 때 그는 35년 된 관저를 리모델링하기 시작했다. 그는 ‘인도네시아의 오늘’을 담기 위해 현대미술을 소화할 수 있도록 관저 구조를 바꿨다. 4개월에 걸쳐 새롭게 탄생한 관저는 벽에 걸린 그림은 물론 가구·장식·소품 하나하나까지 모두 대사 부부의 손길을 거쳤다.관저에 걸린 모든 작품들은 프라세티오 대사 부부의 개인 소유다. 그래서인지 부부는 관저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는 듯했다.

존 프라세티오 대사와 그의 부인 알렉산드리아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관저 내에 가장 눈에 띄는 건 다목적실 한쪽 벽에 자리잡은 커다란 목재장식이었다. 자바섬의 섬세한 전통 목각 기술로 표현된 장식의 왼쪽엔 인도네시아 국기, 오른쪽엔 태극기가 세워져 있었다. 관저에서 리셉션을 열면 대사 부부는 귀빈들과 종종 이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다.


한눈에 봐도 오랜 역사가 느껴지는 이 목재장식은 흔히 티크로 만들어지는 장식문으로 ‘겝욕(gebyok)’이라 불린다. 수 세기 전부터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 만들어왔는데 값이 비싸 부의 상징으로 통한다. 문 하나를 만들려면 보통 15명 이상의 공예가들이 수 개월에 걸쳐 작업을 한다. 요즘엔 겝욕을 대문 대신 하나의 예술품으로 취급해 집 내부에 설치하여 공간을 분리하는 목적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1 햇빛이 쏟아지는 ‘가든 룸(Garden Room)’은 갤러리 같은 모던한 느낌이다.

각 지역마다 겝욕에 새겨지는 문양이 조금씩 다르지만 한 가지 주된 공통점이 있다. 인간이나 동물의 모습은 거의 안 드러낸다는 점이다. 자바섬이 오랜 세월 이슬람교의 영향을 받은 탓이다. 무슬림 사회에서는 인간이나 동물의 상을 예술품으로 만드는 걸 엄격히 금한다. 우상숭배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주로 운명에 관한 추상적인 의미를 내포한다는 겝욕 문양은 그 모양에 따라 각기 다른 미덕을 상징한다. 인도네시아에선 단단한 티크나 마호가니를 사용한 가구와 공예산업이 발달해있다. 열대 낙엽수인 티크는 인도네시아 중에서도 자바섬에서 많이 난다. 견고하고 습기에 강하며 내구성이 탁월해 가구로 만들면 변형 없이 오래 사용할 수 있다.

2 발리섬에서 구한 목재 조각상은 흔히 신화·전설·악마와 신 등을 소재로 한다.

“저는 미술품 수집가예요. 관저에 걸린 모든 작품들을 제가 직접 골랐어요. 한국 현대미술에도 관심이 많아 두 나라의 작가들을 섞어 전시하고 있습니다.” 대사 부인이 가장 애착을 갖는 작품은 인도네시아 중년 여성 작가 크리스틴 아이 추(Christine Ay Tjoe)의 ‘When I Freefall to Reach Home(2012)’이란 제목의 유화. 강렬한 색채와 추상적 형태의 이 그림은 작가가 임신했을 당시 느꼈던 기대감과 행복을 표현했다고 한다. 크리스틴 아이 추와 대사 부인은 서로 친밀한 관계다. 지난해 5월 서울 청담동 송은아트페이스에서 이 작가의 첫 개인전이 열렸을 당시 부인은 협력 큐레이터로 참여했다.


한국 작품들 중 가장 아끼는 건 양혜규 작가의 ‘소리 나는 돌림 도형 F-놋쇠 도금 #31 (2014)’이란 작품이다. 강철판에 놋쇠로 도금된 방울들을 엮은 정사각형 모양의 작품인데 한 쪽 모서리를 시계 방향으로 회전시켰을 때 딸랑거리는 소리가 집 안을 가득 메운다. 부인은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산시키는 것 같아서 좋다”고 말했다.

4 인도네시아 전통 섬유소재인 ‘바틱(batik)’. 박상문 코리아중앙데일리 기자

미술만큼 프라세티오 부인이 공을 기울이는 건 바로 인도네시아 패션이다. 본국의 문화를 알려야 하는 중요한 자리에서 그는 전통 섬유소재인 ‘바틱(batik)’ 직물을 즐겨 입는다고 했다. 바틱은 양초의 원료인 밀랍으로 천에 문양을 그린 다음 여러 번 천연염색을 반복하는 기법으로 만들어진다.


이 날 부인이 직접 선보인 기다란 천은 인도네시아 디자이너 ‘오빈(Obin)’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다양한 패션 용도로 활용할 수 있었다. 부인은 어깨에 둘러 숄로 선보였다가 허리에 둘러 긴 치마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직접 만져보니 한복에 쓰이는 원단보다 훨씬 부드러우면서 가벼운 듯 했다. 바틱은 인도네시아의 각 섬마다 디자인이 다르고 한 땀 한 땀 손으로 작업하기 때문에 보통 4~5개월이 걸린다고 한다. 바틱은 2009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인도네시아의 고유한 문화적 정체성을 대표할 뿐 아니라 인류 문화사적 가치도 높다는 애기다.

3 다이닝룸 식탁 한가운데에 설치된 이끼는 집과 자연을 이어주는 매개체 같은 존재다.

관저를 방문하는 인도네시아인들을 사로잡는 게 무엇이냐고 묻자 부인은 다이닝룸으로 안내해 식탁 한 가운데를 가리켰다. 기다란 아크릴 박스에 심어진 이끼였다. 그는 이끼가 본인의 ‘가드닝(gardening)’ 철학을 표현한다고 했다. 자연과 집을 이어주는 매개체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절제미를 강조한 모던한 실내 분위기 속에서 이끼는 자연을 느끼게 해주는 절묘한 소품으로 작용했다. 본국에서 손님들이 오면 식탁에 놓인 이끼를 보면서 식사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인도네시아 손님들이 주로 먹는 메뉴는 놀랍게도 한식이라고 한다. ‘맛집 탐방’이 취미라는 부인은 외부에서 다양한 한식을 맛본 뒤 대사관 요리사와 의논해 인도네시아-한국 퓨전음식이나 전통 한식을 시도한다고 했다. 예술을 사랑하는 그녀 답게 플레이팅에 특별히 공을 들인다. 순두부찌개·떡볶이·잡채 외에도 김을 곁들인 인도네시아 샐러드 등을 손님들에게 내놓는다.


반대로 한국인들에게 주로 선보이는 인도네시아 음식은 양념된 고기에 코코넛즙을 곁들인 ‘비프 렌당(beef rendang)’, 닭고기 살을 각종 향신료에 양념하여 굽는 ‘사떼 아얌(sate ayam)’, 볶음면 ‘미고렝(mire goreng)’, 땅콩 소스와 섞은 샐러드 ‘가도 가도(gado-gado)’, 인도네시아식 삼계탕 ‘소토 아얌(soto ayam)’ 등이다.


양국을 대표하는 미술 작품들을 보면서 두 나라의 음식을 공유하는 방식은 프라세티오 부인이 고안한 최고의 접대인 셈이다. “인도네시아인들이 관저에 방문할 때면 되도록 한국 음식을 대접하려고 해요. 다른 나라에 온 만큼 현지 문화를 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자주 시도하는데 반응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이성은 코리아중앙데일리 기자lee.sunge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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