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를 몸무게로 평가하지 말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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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9호 29면

해마다 이맘때면 TV에선 익숙한 영화들이 상영된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도 그 중 하나다. 통통한 몸매 때문에 1년 365일 칼로리와의 전쟁에 몰두하던, 에릭 카멘의 ‘올 바이 마이 셀프’를 부르며 싱글의 비애를 대표했던 서른 두 살 노처녀. 뺀질뺀질한 편집장 다니엘 클리버(휴 그랜트)를 짝사랑하지만 결국 마크 다아시와 진실한 사랑을 하게 된다.


여기서 잠깐, 브리짓이 사랑에 빠졌을 때가 몸무게가 줄어든 후일까 전일까. 그녀는 살이 빠지면 완벽한 남자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죽어라(?) 다이어트를 하긴 했지만 몸무게와 진정한 사랑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다음은 김삼순 언니의 경우다. MBC 드라마 ‘내 이름의 김삼순’에서 솔직하고 당당한 커리어 우먼의 모습을 보여준 김삼순 역시 현진헌(현빈)을 만나 사랑에 빠졌을 때 몸매는 여전히 통통한 상태였다.


물론 영화나 드라마 속 얘기다. 현실을 사는 남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쭉쭉빵빵한’ 그녀들을 좋아한다. 우월한 기럭지와 환상의 비율을 자랑하는 몸매는 어떤 옷을 입어도 태가 나니 눈길이 절로 갈 수밖에. 그래도 브리짓 존스와 김삼순을 잇는 또 한 명의 당당하고 사랑스러운 통통녀가 이 시대에 나타나 주길 바랬다. 희망이랄까, 위안이랄까. 모두가 같은 물길에 휩쓸려가는 건 아니라고, 세상에는 다양한 미의 기준이 있고 진실한 사랑은 몸무게와는 상관없다고 말해줄 그런 캐릭터 말이다.


그래서 최근 방영중인 KBS 드라마 ‘오마이비너스’를 열심히 봤다. 고교시절 ‘대구 비너스’로 불릴 만큼 완벽한 미모를 뽐냈던 강주은(신민아)이 변호사가 되는 과정에서 구질구질한 세상을 버티기 위해 폭식을 거듭한 결과 통통녀로 둔갑(?)한 사연은 설득력이 있었다. 힘겨운 집안 사정에 마음이 무너지고, 엉덩이 힘으로 버텨야 한다는 사시 공부를 하면서 달콤한 음식에 유혹될 수밖에 없었다는 건 충분히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우연한 기회에 ‘섹시 처발처발한’ 헬스 트레이너이자 의료법인 이사장인 김영호(소지섭)를 만나 사랑에 빠질 때까지만 해도 스토리는 내가 기대하는, 아니 바라는 쪽으로 흘렀다. 영호는 할리우드 유명 연예인의 완벽한 몸매를 만든 장본인이지만 인정 많고 당당한 변호사 강주은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서 매력을 느꼈으니까.


그런데 드라마가 후반부에 이른 지금, 사정이 달라졌다. 비록 갑상선 기능저하증을 떨어버리기 위해 운동을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강주은은 몰라보게 날씬해졌다. 놀라운 분장술을 선보였던 턱밑 살도 다 없어지고, 더 이상 배와 엉덩이에 보기 흉한 쿠션을 넣은 채 연기하지 않아도 된다. 지난주에는 블랙 미니 드레스 차림의 연예인 포스로 등장하기까지 했다. 여전히 영호는 “건강한 여자가 더 예뻐”라며, 결코 강주은이 날씬해져서 예뻐 보이는 게 아니라고 시청자들을 위한 대사를 날린다. 하지만 누가 그 말을 믿을까.


하필 강주은의 환골탈퇴는 연말에 이루어졌다. 가뜩이나 외로운 싱글들 가슴에 불을 지르면서 말이다. 몸집이 크고 통통하면 옷맵시를 내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여성이 갖춰야 할 덕목에는 맵시만 있는 게 아니다. 말씨, 솜씨, 맘씨도 있다. 당연히 이를 평가하는 기준과 몸무게는 상관이 없다. 대한민국 남성들의 눈이 좀 더 넓고 깊어졌으면 좋겠다. 정말 멋진 여성을 발견할 수 있는 혜안을 갖도록 말이다.


다시 드라마로 돌아가서 “살이 찌는 건 외롭거나, 괴롭거나, 둘 다이거나 이기 때문”이라는 대사를 떠올려본다. 살이 찌는 걸 정말 조심할 필요는 있겠다는 생각이다. 외롭거나 괴로운 인생은 정말 싫지 않은가 말이다.


글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사진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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