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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판도라'가 남긴 것: 한 사람을 위한 눈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그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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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 사고를 다룬 재난영화 ‘판도라’(12월 7일 개봉, 박정우 감독)를 2016년의 대한민국에서 본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아니 소름 끼치는 경험이다. 지난 몇 년간 한국 사회가 경험한 재난을 돌아볼 때, 현재 우리의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사태가 이 영화를 단순한 오락영화로 볼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판도라’는 지금의 한국 사회에 어떤 물음을 던지는가.

우리는 날마다 죽음의 위협을 받으며 산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 교통사고를 당할 수도 있고, 어디선가 날아온 돌에 맞아 이 세상을 떠날 수도 있다. 외진 골목길에서 사이코패스를 만날 확률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런데 ‘판도라’가 다룬 원전 문제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전자들이 예측하기 어렵고 우연에 기인하는 불가항력적 사고라면, 방사능의 재앙은 이미 충분히 예고된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이 제2의 체르노빌(우크라이나) 혹은 후쿠시마(일본)가 될 리 없다’고 누가 장담할 것인가. 게다가 우리나라는 원전의 밀집도나 설비 용량이 세계 1위다. 이 판도라의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누구나 알고 있다. 아무리 희망이 함께 들어 있다 해도 상자가 열리는 순간 모든 것이 끝장난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극도의 공포 속에 살아가고 있다.

한국영화 최초로 원전을 다룬 ‘판도라’는 바로 이런 경고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 영화는 원자력발전소가 위치한 작은 어촌을 배경으로, ‘강진에 이은 원전 폭발 사고가 어떻게 인간을 집어삼키는가’를 보여 준다. 평화로웠던 마을은 폐허가 되고, 위험에 노출된 시민들은 안전한 곳을 찾아 달리고 또 달린다. 소재는 새롭지만 이야기하는 방식은 아주 직접적이다. 재난의 경고, 이를 무시하는 무능력한 정부, 소시민들의 사투로 이어지는 재난영화의 공식을 그대로 따른다.

전형적인 스타일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익숙한 장르적 장치도 영화의 쾌감을 위해서라면 필요하다. 다만 재난을 다루는 범위와 시점이 아쉽다. ‘판도라’는 원전의 공포를 기존 재난영화와 같은 방식으로 다룬다. 그러나 방사능의 피해가 본질적으로 화재를 진압하거나 테러리스트를 처단하는 것처럼 단번에 해결되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 이 영화는 재혁(김남길)을 비롯한 원전 직원들이 희생해 재앙을 막는 것으로 끝난다. 하지만 관객에게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결말 이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판도라’와 같은 규모의 폭발 사고가 일어나면 어디까지 죽은 땅이 될 것인가, 생존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재난은 어떻게 개인의 삶을 파괴하는가. 이 영화는 이런 질문을 남겨 놓는다.

재앙 이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판도라’는 어떤 길로 가든 결말이 정해져 있다. 충분한 안전 대비 없이 원전을 운영하고, 최소한의 컨트롤 타워도 없는 나라에서 사고가 난다면, 그 다음은 불 보듯 뻔하다. 이런 상황의 희생자는 늘 정보와 안전망에서 소외된 국민이다. 극 중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총대를 맨 발전소 하청업체 직원들의 임금이나 복지 수준도 보잘것없었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도 마을 주민들은 ‘원자력 발전소 덕분에 우리가 이만큼 먹고산다’며 흡족해 한다. 하긴 대통령(김명민)도 알지 못하는 원전의 위험을, 마을 주민들이 어찌 알겠는가. 그들 중에서도 재혁은 나라를 믿지 못하는 무정부주의자에 가깝지만, 결과적으로 수많은 국민을 살린 영웅이 된다. 그러나 그는 애초부터 선택의 여지가 없던, ‘강요된 영웅’이다.

원전 사고는 컨트롤 타워를 잘 구축한 나라에서조차 수습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하물며 국가 시스템과 소통 체계가 무너진 나라에서라면, 가련한 국민은 자신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판도라’를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 바로 이 점이었다. ‘나는 과연 나를, 내 가족을 지킬 능력이 있는가?’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누군가 내게 물었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이기 때문에 더 무섭지 않느냐’고. 물론 무섭다. 피폭될까 무섭고, 죽을까 무섭고, 아이를 지키지 못할까 더욱 무섭다. 재난영화 주인공들은 대체로 해당 재난 분야의 전문가인 경우가 많다. ‘해운대’(2009, 윤제균 감독)의 지질학자(박중훈)나 ‘감기’(2013, 김성수 감독)의 감염내과 전문의(수애)처럼 특별한 지식을 갖춘 이들은, 위험을 미리 알아차리고 가족을 지킨다. 그러나 대다수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판도라’는 원전 사고의 위험을 구구절절 설명하지만, 그보다 더 인상 깊게 다가온 것은 최대한 멀리 도망가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낸 군중신이다. 특히 병목현상으로 도로가 꽉 차고, 아수라장에서 정혜(문정희)가 아이의 손을 놓쳐 혼비백산하는 장면은 꽤나 섬뜩하다. 그 시각, 총리(이경영)는 “1만5000명의 사람들을 살리자고 ‘5000만 국민’을 위험에 빠뜨릴 순 없다”고 말한다. 총리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1만5000명의 국민은 존엄성을 지닌 개인이 아니다. 통제해야 할 수많은 좀비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묻게 된다. 재앙 이후, 우리는 과연 인간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혹은 인간적으로 죽을 수 있을까.

무능할지언정 인간적인 대통령

‘판도라’가 개봉한 뒤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됐다. 상자를 열고 보니, ‘판도라’는 본의 아니게 현실을 그대로 찍어 놓은 듯했다. 박정우 감독은 “청와대나 권력 문제를 비판하려 만든 영화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 영화가 시작될 때 ‘영화 속 설정은 허구’라는 자막이 깔린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보며 청와대 비선, 불통(不通) 대통령, 국민을 생각하지 않는 정부 그리고 세월호 참사 당시 실종자 수색에 참여했던 민간 잠수사 故 김관홍씨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지금 ‘판도라’를 보며 많은 사람들이 2014년 4월 16일 이후의 참담한 기억을 떠올리고 몸서리치는 이유다. 심지어 극 중 정부는 현실의 정부보다 훨씬 유능하고 인간적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만도 못한, 야만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판도라’의 말미, 원전 속에 홀로 남아 죽음을 기다리는 남자의 모습이 전국으로 방송된다. 그는 안전모에 달린 작은 카메라를 향해 유언을 남긴다. 아니, 그건 ‘유언’이라기보다 ‘살고 싶다는 처절한 외침’에 가깝다. 이 길고 신파적인 장면은, ‘판도라’가 희생자에게 갖추는 최소한의 예우처럼 보인다. 재난 그 자체보다 재난에 처한 개인의 사연에 집중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이 장면은, 그간의 숱한 재해들을 수치와 통계로 기억해 온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 준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일어났을 때, 기타노 다케시 감독은 “2만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한 사람이 죽은 2만 개의 사건으로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야만 피해자의 고통을 제대로 헤아릴 수 있다는 뜻이다. 이는 지금 우리 사회에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기도 하다. ‘판도라’에서 대통령은 원자력 발전소 노동자의 이름 석 자를 부르며 오직 그 사람만을 위한 눈물을 흘린다. 이 장면은 대단히 중요하다. 더 나은 세상은 한 개인을 존중하는 인간다움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는 무능할지언정 인간의 존엄성 앞에서 고개를 숙일 줄 아는 대통령이다. 한 사람을 위한 눈물. 어쩌면 그것이 판도라의 상자에 남은 마지막 희망이자, 우리가 그토록 찾고 있는 그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신민경 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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