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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아차 싶었을까 의도된 침묵일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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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정용수 기자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장
정용수 정치부 기자

정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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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북한 언론들은 한국에 대해 조용했다. 이날은 서울 광화문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8차 촛불집회가 열린 다음날이었다. 대대적으로 촛불 시위와 탄핵 요구를 보도하던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북한의 관영 언론인 노동신문이 대표적이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5주기 행사 기사 일색이었다. 그들이 우상화하고 있는 ‘수령’ 5주기를 맞았으니 이날은 그렇다 치자.

공교롭게도 지난 9일 박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된 직후부터 북한 언론에서 촛불집회나 탄핵 소식은 확 줄었다.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이후 상당 부분을 차지했던 탄핵이나 촛불 시위 관련 기사가 거의 사라졌다. 일각에선 “북한은 김일성, 김정일과 관련한 행사는 하루만 하는 게 아니라 일주일 이상 분위기를 조성한다”(정부 당국자)고 분석한다. 김정일 5주기 행사, 특히 주민들에게 김정일·김정은의 업적 선전에 몰두하느라 그랬다는 얘기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물론 조금 더 두고 봐야 한다. 입에 담지 못할 표현을 써가며 비난했던 박 대통령이 탄핵됐으니 북한은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지켜보겠다는 생각이 강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론 김정은 위원장이 ‘아차차’ 싶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국 촛불의 힘을 북한 주민들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에 말이다. 어렸을 때부터 “수령의 지시를 무조건 이행하는 것은 목숨과도 같다”는 절대 충성을 강요받아 온 북한 주민들이다. 그랬던 그들에게 광화문에 켜진 촛불이 학습도구가 되지 말란 법이 없다. 북한은 2010년 말 튀니지에서 시작돼 아랍,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휩쓴 민주화 바람에 대해 철저히 차단막을 친 적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비난을 안 해도 문제냐’는 지적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지난달부터 김정은의 동선(動線)을 보면 이럴 때일수록 조심해야 한다는 우려도 든다. 김정은은 서해와 동해를 넘나들며 포사격과 연평도 공격계획, 비행술 대회 등 전투태세 강화를 독려했다. 탄핵 표결 다음날엔 청와대 타격 훈련을 직접 참관하기도 했다.

한·미 양국은 대북 감시와 경계 태세를 강화하고 북한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하지만 2010년 한·미 연합훈련 중이던 3월 26일 천안함 폭침사건이 발생한 점을 고려하면 북한의 도발은 때를 가리지 않는다. 장소도 불문이다. 북한은 이미 어디에선가 도발할 준비를 끝내고 있을지 모른다. ‘짓는 개는 물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다. 북한은 조용할 때, 남들이 잘 때 뒤통수를 치는 빨치산 전술 구사에 능하다. 탄핵이 진행되더라도 안보에는 빈틈이 있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정용수 정치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