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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억 넘는 해외계좌 국세청이 들여다본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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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9호 18면

#1. 압구정동에서 병원을 운영하는 하모(45) 원장은 이달 초 저축성보험 비과세 한도가 줄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거래하는 은행의 프라이빗뱅커(PB)를 찾아갔다. 현재 그는 지난해부터 매달 1000만원씩 월납식 저축보험에 넣고 있었다. 종합소득세 부담이 컸던 하 원장은 저축성 보험의 비과세 혜택이 줄기 전에 상품을 하나 더 가입하길 원했다. PB와 상의 끝에 머니마켓펀드(MMF)에 넣어뒀던 여유자금 2억원을 거치식으로 10년간 묻어두는 저축성보험(즉시연금보험)에 가입했다.


#2. 싱가포르 유명 투자은행(IB)에서 근무하다 지난해 말 한국 지점으로 옮겨온 홍모(41) 상무는 요즘 고민이 많다. 최근 한국과 싱가포르가 금융정보자동교환협정을 체결해 그의 금융정보가 국세청에 공개될 수 있어서다. 한국에 급하게 들어오면서 싱가포르 집을 판 금액과 일부 금융자산을 현지 은행에 그대로 넣어뒀기 때문이다. 홍 상무는 “싱가포르 금융사는 세제 혜택이 많고 시스템이 잘 돼 있어 한국에서 이용하는 데 편리하다”며 “지금이라도 계좌를 국내 금융사로 옮길지 아니면 해외금융계좌로 신고를 하는 게 세금 부담이 낮은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소득세율 높아지고 증여세 공제는 줄어]
이처럼 요즘 나라 안팎으로 세금망이 촘촘해지면서 고액자산가들의 세(稅)부담이 커지고 있다. 한국을 비롯한 각국에서 부족한 세수를 마련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세금 거둬들이기에 나서고 있어서다. 전 세계 정부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초저금리를 통한 경기부양에 나섰지만 좀처럼 경기는 살아나지 않고 세수 펑크(세수 결손)에 대한 우려는 한층 커졌다. 기업은 투자를 줄이고, 가계는 지갑을 닫으면서 법인세·부가가치세 등 굵직한 세목들이 덜 걷히기 때문이다. 결국 나라 안에선 박근혜 정부의 주요 정책기조였던 ‘증세 없는 복지’를 깨고 증세를 했고. 밖에선 부족한 세수를 메우기 위해 국제공조를 통한 역외탈세에 대한 조사를 강화하고 있다.


내년부터 바뀌는 세법을 살펴보면 폭은 미미하지만 고액자산가(고소득자 포함)의 세금 부담은 늘고, 공제 혜택은 줄었다. 이 중에서도 소득에서 공제액을 뺀 과세표준이 5억원을 초과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40% 최고세율을 적용한 게 가장 눈에 띈다. 현행 소득세는 과세표준 1억5000만원 초과자에게 38%를 매겼다. 내년부터 연소득이 5억원(과세표준 기준)을 넘는 고소득자는 최고세율이 2%포인트 더 오른다. 소득세 최고세율이 40%대가 된 것은 2001년 이후 16년 만이다. 2002년 소득세 최고세율이 36%로 떨어졌고 이후 35%대까지 낮아지기도 했다. 소득세 최고세율이 38%로 적용된 것은 2012년부터다. 기획재정부는 약 4만6000명이 소득세 40% 최고세율 구간에 포함될 것으로 추정한다. 예를 들어 연소득(과세표준 적용)이 8억원이면 600만원, 10억원이면 1000만 정도의 소득세를 더 내야 한다. 또 상속·증여세를 기한 내 신고하면 세액 10%를 깎아주는 세액 공제율이 7%로 줄었다. 원종훈 KB국민은행 세무팀장은 “10억원의 상속세를 신고하면 기존엔 10% 할인돼 9억원만 내면 됐지만 개정 이후엔 9억3000만원으로 세금이 늘기 때문에 상속세율이 올라가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새어 나가는 세금을 잡기 위해 고액상습체납자의 공개 대상 범위를 확대했다 현재까지는 세금을 밀리거나 내지 않은 금액이 3억원 이상이면 공개했던 명단을 2억원으로 낮췄다.


고소득자의 각종 세금 감면 혜택도 축소됐다. 내년부터 연간 1억2000만원을 넘는 소득자의 신용카드 소득공제 한도가 300만원에서 200만원으로 쪼그라든다. 2018년부터는 연소득 7000만원 초과~1억2000만원 이하인 근로자의 해당 소득공제 한도가 250만원으로 준다. 신용카드 소득공제는 2018년 말까지고, 연소득 7000만원 이하인 경우엔 변동이 없다. 특히 비과세 상품으로 고액자산가가 선호하는 저축성보험도 공제 혜택이 줄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는 납입규모가 2억원 이하이고, 계약기간이 10년 이상인 장기 저축성보험은 이자소득세 15.4%가 면제된다. 저축성보험의 공제 혜택이 얼마나 줄어들지는 소득세법 시행령 개정 사항으로 아직 정확하게 정해지진 않았다. 국회의 잠정 합의안을 보면 비과세 납입한도가 2억원에서 1억원으로 줄 가능성이 크다.

[해외 계좌 신고하지 않았다간 세금 폭탄]
가족회사 운영에 대한 세제혜택이 줄었다. 가족회사는 친족 등 특별한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이 주식 대부분을 소유한 회사를 뜻한다. 이 중에서도 부동산 임대사업을 하는 곳은 접대비 한도(1200만원)와 업무용 차량비에 들어가는 비용(800만원)을 절반으로 축소했다.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가족회사에 대한 논란 이후 조세회피 목적의 법인에 대한 과세를 강화한 것으로 풀이된다.


앞으로 고액자산가들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 굴리고 있는 자금도 세금을 세세하게 따져야 한다. 한때 비밀자금의 은신처로 손꼽던 홍콩·스위스 등지 금융사의 빗장이 잇따라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이 홍콩과 맺은 조세조약은 물론 미국과의 금융정보자동교환협정(이하 FATCA) 비준 동의안이 국회에 1년 넘게 계류하다 지난 9월 국회를 통과했다. 이제 국세청은 미국과 홍콩에 개설된 한국인 계좌정보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됐다. 역외탈세를 막고 탈세자에겐 세금을 매길 자료를 확보한 셈이다.


FATCA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2010년 도입한 역외탈세 방지법 중 하나다. 전 세계 금융회사들이 미국 납세자가 보유한 5만 달러(약 5800만원) 초과 계좌 정보를 미국 국세청(IRS)에 신고하도록 의무화했다. 이를 어기는 금융회사는 미국에서 투자해 얻은 배당·이자 등 소득의 30%를 벌금으로 내야 한다. 한국도 지난해 6월 협정을 체결했지만 국회 반대로 시행이 차일피일 미뤄진 것이다. 현재 한국 금융회사는 전산을 통해 5만 달러가 넘는 계좌를 보유한 미국 시민권자·영주권자의 정보를 모으고 있다. 올해 말께 국세청이 모은 정보를 미국에 보내면 IRS는 미국 내 은행에서 연간 이자 10달러(1만1670원) 초과하는 계좌를 보유한 한국인의 금융정보를 보내준다. 이때 한국에 거주하는 고액자산가가 세금폭탄을 받을 수 있는 부분은 바로 해외금융계좌 신고 여부다. 예금은 기본이고 주식·채권·선물 등 금융거래를 위해 해외 금융사에 개설한 계좌를 신고해야 한다. 매월 말 기준으로 계좌 잔액이 한 번이라도 10억원(원화 기준)을 초과하면 세무서에 신고해야 한다. 만약 신고를 안 했거나 계좌금액을 낮춘 경우 최대 20% 과태료를 물어야 한다. 미신고 금액이 50억원을 초과하는 경우 인적사항도 공개한다. 실제로 이달 8일 조현준 효성그룹 사장과 김희근 벽산 엔지니어링 회장이 해외금융계좌를 제대로 신고하지 않았다가 적발돼 이름·주소지·위반금액 등이 국세청 홈페이지에 세세하게 공개됐다.

[싱가포르에 맡긴 한국인 자금 1조3000억원]
FATCA보다 더 큰 문제는 84개국이 손을 잡는 다자간 금융정보교환협정(MCAA)이다. MCAA는 내년 시행된다. 이중 한국은 독일·헝가리·이탈리아 등 38개국과 금융정보를 교환할 예정이다. 여기엔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케이만 제도 등 세계적으로 손꼽는 조세회피처도 포함됐다. 특히 2018년부터는 한국인의 금융거래가 활발한 일본·중국·캐나다 등 31개국과 추가로 협정을 맺기 때문에 과거처럼 비밀금고를 갖는 게 쉽지 않다. 더욱이 다자간협정을 맺은 국가에선 한국인의 전체 계좌를 뽑아서 국세청에 보내주기 때문에 고액자산가 입장에선 FATCA보다 더 까다로울 수 있다.


2018년엔 싱가포르에서도 한국인 금융계좌 정보를 받을 예정이다. 올해 10월 한국 정부는 싱가포르와 별도로 협정을 맺었다. 납세자의 계좌번호는 기본이고 계좌잔액, 이자·배당 등 소득유형 등을 매년 교환할 예정이다. 상당수 고액자산가는 법인세가 낮고 금융 규제가 적은 싱가포르 금융회사를 선호했다. 지난해 한국인이 싱가포르 금융회사에 맡긴 자금만 1조3240억원(2016년 국세통계)이다. 어느 나라보다도 많다. 뒤를 이어 미국(1조2881억원), 홍콩(9263억원), 일본(5425억원) 순이었다. 오호선 국세청 역외탈세정보담당 과장은 “이제는 싱가포르는 물론이고 미국·홍콩·스위스 등 전세계 120여 개국이 공조하는 금융정보 인프라가 완비돼 역외탈세는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염지현 기자 yj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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