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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제작자 인터뷰 릴레이⑤ '동주' 제작한 영화사 루스이소니도스 신연식 대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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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정경애(STUDIO 706)

사진 : 정경애(STUDIO 706)

“제작비 5억원짜리 영화지만, 열정은 50억원도 넘었습니다.” 지난달 열린 제37회 청룡영화상에서 ‘동주’(2월 17일 개봉, 이준익 감독)로 각본상을 거머쥔 신연식(40) 감독의 수상 소감이다. 아는 사람은 안다. 이 말이 문자 그대로 사실이란 것을. 그가 영화감독이자, 작가, 제작자로 살아온 지난 20년이 그것을 증명한다. 열아홉 살에 연출부로 영화계에 입문해 참여하는 영화마다 내리 불발되자, 2009년 “홧김에 신혼집 전세금을 빼 영화사 루스이소니도스(LUZ Y SONIDOS)를 차렸다”는 신 감독.

이후 ‘러시안 소설’(2013) ‘배우는 배우다’(2013) ‘조류인간’(2015) 등 10억원 이하 저예산으로 자신이 연출하는 영화들을 제작하며 실험을 거듭해 왔다. 일제강점기 민족 시인 윤동주(1917~1945)의 삶을 흑백 화면에 아로새긴 ‘동주’는 그가 직접 감독하지 않고 제작한 루스이소니도스의 첫 영화다.

연출을 맡은 이준익 감독의 아이디어에 저예산 영화에 대한 신 감독 자신의 노하우를 더해, 시나리오를 쓰고 제작에 나섰다. 결과는 대성공. 손익분기점의 네 배가 넘는 관객 117만 명을 모았다. ‘동주’를 시작으로 “우리 시대를 돌아보게 만드는 예술인 10인 영화 시리즈 제작”을 선언한 신 감독. “말보다 행동을 믿는다”는 그는 “최근 한국 중·저예산 영화의 실종에 대한 우려”를 타파할 새로운 작당을 모의하고 있었다.

루스이소니도스. 스페인어로 ‘빛과 소리’라는 뜻이다. “영화는 빛과 소리의 마법이니까요. 입시 점수 맞춰 들어간 대학 전공을 유일하게 살린 것”이라며 신연식 감독이 멋쩍게 웃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과에 들어간 열아홉 살의 그는 강의실 대신 영화 현장을 택했다. 결국 대학 중퇴. 그러나 영화는 호락호락하게 길을 열어 주지 않았다. 계속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스스로 버틸 방법을 찾는 수밖에 없었다.

벼랑 끝에서 세운 제작사, 루스이소니도스

“사실 여태 만든 영화들이 전부 떠나려고 만든 거예요. 마지막으로, 내 맘대로 만들고 집어치우자는 생각으로요.” 신 감독의 말이다. 낙관적인 희망을 품을 겨를이 없었다. 1995년 연출부 막내로 처음 투입된 프로젝트부터, 그가 참여한 영화들은 내리 10년간 촬영도 시작하기 전에 줄줄이 엎어졌다. 직장인으로 치면 입사한 회사마다 도산해 버린 셈이다. 또래들이 차근차근 영화 현장에서 중책을 맡는 동안 그는 군대에 다녀왔다. 연출부 막내는 변변한 봉급도 받지 못하던 시절이다. 한두 편도 아니고 무려 10년, 그는 무직자 신세를 전전해야 했다. “누가 내 인생을 갖고 장난치나 싶었다”고 그는 말했다. 울화가 치밀 때마다 시나리오를 썼다. “옛날에는 감독님들이 판권도 사지 않은 소설들을 ‘시나리오 한번 써 보라’며 던져 줬어요. 그렇게 쓴 시나리오가 많아서, 감독님들 사이에서는 인정받았죠.”

“창작은 태어날 때부터 했다”는 그다. “술 먹고 학교를 그만두겠다며 날뛰던” 고교 시절에도 “글 쓰는 순간만큼은 마음껏 에너지를 발산하는 기분”이었다. 할리우드 오락영화가 전부인 줄 알았던 신 감독이 TV에서 1970~1980년대 명화 걸작선을 본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대부2’(1974), 우디 앨런 감독의 ‘애니 홀’(1977),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비정성시’(1989) 등을 잇달아 본 것이다. 당시 그는 ‘영화’라는 매체의 무궁무진한 자장에 충격받았다. 그때부터 무작정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완성한 첫 작품이 바로 ‘프랑스 영화처럼’(1월 14일 개봉, 신연식 감독)에 실린 단편 ‘맥주 파는 아가씨’. “지금도 첫 신, 첫 대사 쓸 때의 설렘이 있어요. 그 공간과 세계의 문을 처음 열고 들여다보는 사람이 나뿐인 거잖아요.”

신 감독에게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영화로 돈 버는 것보다, ‘최대한 이야기를 훼손하지 않고 스크린에 펼치는 것’이 그의 관심사였다. 제작비 40만원을 들여 단 5회차 촬영으로 완성한 ‘피아노 레슨’(2003)에 이어, 300만원으로 두 번째 장편 ‘좋은 배우’(2005)를 찍었다. 늦깎이 배우 지망생이 전설의 연기 대가를 찾아 강원도 산속에 들어가는 여정을 그린 이 3시간짜리 흑백영화는 제10회 부산국제영화제, 제31회 서울독립영화제 등에서 공개돼 주목받았다. 서른한 살에 상업영화 연출 계약을 하며, 이제 고생은 끝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이후에도 이런저런 계약이 불발됐고, 준비 중이던 ‘페어 러브’(2010)마저 견해 차이 등의 문제로 제작사 네 곳을 전전하며 4년간 허송세월했다. 신 감독은 다시 벼랑 끝에 몰렸다. “그때 ‘안 되는 놈은 안 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페어 러브’를 엎을 마음으로 집에 왔는데, 집 주인이 방을 빼라더군요. 이럴 바엔 차라리 전세금 1억원으로 영화라도 만들고 그만두자 싶었어요. 시나리오만 보고 3년을 기다려 준 안성기 선배의 격려가 큰 힘이 됐어요. 영화하면서 일은 정말 안 풀렸지만, 이준익·김기덕 감독님 같은 좋은 선배들 덕에 버틸 수 있었죠.”

`동주` 촬영 현장.

`동주` 촬영 현장.

한국 영화계에 실종된 기획의 전문성

신 감독은 루스이소니도스를 열고, 그동안 생각지도 않았던 제작에 뛰어들었다. ‘페어 러브’ 이후 다른 제작사와의 상업영화 계약이 성사되기도 했지만, 부당한 처우에 결국 등지게 됐다. “제작자의 무능과 부도덕으로 인한 부조리죠. 옛날에는 감독의 업무 범위와 계약 기간이 애매했어요. 자칫 잘못 계약했다가 어떤 제작사에 5년 넘게 붙잡혀 있거나, 선금 500만원에 아이템만 빼앗긴 경우도 있었죠. 사태가 너무 심각하다 보니 한국영화감독조합에서 감독표준계약서를 만들게 됐고, 그 일에 제가 총대를 맨 겁니다.”

그의 설명은 이렇다. “한국에서는 제작사가 영화로 번 전체 수익의 30~40%를 제작 지분으로 가져가요. 그것은 제작자가 기획·개발 단계를 주도하며 떠안는 리스크를 투자사가 인정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지금껏 제가 만난 제작자 중 기획에 대해 그 정도 전문성을 가진 분은 이준익 감독님, 단 한 사람뿐이었어요.” 이에 대해 신 감독은 “감독·작가와 다르게 제작자는 역량과 기능을 검증할 단계와 방식이 없다”고 설명했다. “대부분의 제작자는 ‘나에게 사람 보는 눈이 있고, 내가 시나리오를 평가할 줄 안다’는 자부심만 갖고 영화를 제작해요. 원래 제작자라면 이 영화가 왜 사업적으로 가능성이 높으며 어떤 의미로 담론화될 수 있는지 구체적 방식을 제시해야 하죠. 그런데 지금은 감독이랑 작가에게 아이디어만 던져 놓고 ‘어떤 느낌인지 알겠지? 써 봐!’ 그래요. 5년간 죽어라 개발하면 자기 수익만 취하지, 고생한 이들에게 제대로 분배하는 경우가 드물어요.”

신 감독은 최근 한국영화 시나리오의 취약점도 꼬집었다. “시나리오를 ‘보물 지도’에 비유한다면, 감독은 어떤 보물을 찾을지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이잖아요. 보물 찾으러 가다가 강을 만날 경우 다리를 놓거나, 다른 길로 돌아가거나, 배를 탈 수도 있어요. 정해진 길은 없지만 보물에 다다랐을 때, 우리가 지나온 길이 영화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요즘 ‘보물’ 없이 만드는 영화가 얼마나 많은 줄 몰라요. 이 영화를 왜 만드는지도 모르면서 만든다는 뜻이죠. 제작자는 무조건 잘 팔리는 보물을 찾아오라고 하니까요. 그렇다 보니 어떻게든 보물을 만들어 내기 위해 수정고가 40~50고까지 나오기도 하죠. 감독에게 리스크를 떠안기는 구조예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제작자들은 발끈하겠죠? 그런데 내 경험상 정말 그랬어요.”

루스이소니도스가 계속 다른 감독과 협업하려는 이유도 “좋은 창작자에게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어서”라고 말했다. “아무리 신인 감독이라도 그가 가져온 아이템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면, 공동 기획자로서 당연히 지분을 배분해야죠. 내가 가진 아이템으로 내가 시나리오를 써서 다른 감독에게 연출만 맡기더라도, 연출 업무 범위와 계약 기간을 따져 그에게 최소 10% 이상의 제작 지분을 줄 거예요. 본인의 시나리오를 들고 찾아온 감독에게는 30% 이상. 계약 내용은 경우에 따라 달라져야죠. 천편일률적으로 계약하는 지금의 한국 영화 산업이 이상한 거예요.”

저예산을 넘어 다양한 규모에 도전하다

그동안 신 감독이 초저예산 영화 제작을 고집한 건, 원하는 영화를 만들되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서다. “흥행에 실패해도 투자금은 회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제작자로서 지켜 온 지론이니까. 이를 위해 저예산 촬영에 능한 제작팀을 고정적으로 꾸려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영화는 결코 비즈니스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제 정체성의 베이스는 작가예요. 작가로서 제작도 하고 연출도 하는 거죠. 제가 제작한다면, 그것은 각본이든 각색이든 ‘라이팅(Writing)’도 병행한다는 말입니다. 제일 좋아하는 것이 이야기를 쓰는 일이니까요.”

현재 신 감독은 논란이 예상되는 기독교영화를 직접 연출하고 있다. ‘조류인간’ 당시 극장 상황 악화와 인프라 부족으로 실패한 배급에 다시 도전할 참이다. 고등학생 때 써 둔 시나리오 한 편은 연출자를 물색 중이다. 두 명의 스무 살 여성이 지역 보궐 선거에 출마해 기성 정치권을 골탕 먹이는 내용이다. 갑신정변을 비롯해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에 연루된 양대 여성 킬러단이 주인공인 영화도 기획하고 있다. 이를 위해 내년께 만들 예정인 한국 여자 배구를 다룬 상업영화에서 여성 배우를 대거 기용한 액션 시퀀스를 테스트해 볼 계획이다. “어떤 일이든 최소 세 가지 목적을 겨냥하는 것”이 그가 일하는 방식이니까.

윤동주를 필두로 한 ‘예술인 시리즈’도 계속 이어진다. 일제강점기 가수 이난영(1916~1965)은 이미연 감독, 만담가 신불출(1905~?)은 박정범 감독과 함께 영화화를 추진하고 있다. 신 감독 자신은 김기영(1919~1998) 감독이 영화 촬영 도중 겪는 하룻밤 판타지를 컬러와 흑백을 오가며 담아낼 예정이다. 당분간은 저예산에서 벗어나 다양한 포맷에 도전할 생각이다. 이난영에 관한 영화는 제작비 30~40억원 규모의 상업영화이며, 그 외 100억원대 대작으로 제작을 고민 중인 작품도 있다. 최근 한국영화 부실의 원인으로 지적된, 제작비 10~40억원대 중급 영화 시장을 살리기 위한 시도도 멈추지 않는다. “어쨌든 저는 창작자의 입장에서 제작하는 거예요. 창작자가 자본과 싸워 이길 수는 없어도, 자본을 선도할 수는 있죠. 양질의 컨텐트로 자본을 향해 끊임없는 판타지를 심어 줘야 해요. 상업영화는 제작만 하고 독립영화로 연출하는 것이 지금의 제 ‘이상’이에요. 독립영화 시장은 매년 더 척박해지는 상황이지만, 온라인상에서 새로운 시장성이 확보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해요. 기술 발전에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영화사 루스이소니도스의 주요 필모그래피

페어 러브신연식 감독 | 안성기, 이하나 | 2010 전 재산을 사기당한 50대 노총각 형만(안성기)과 그를 등쳐 먹은 친구의 딸인 20대 여대생 다은(이하나)의 러브 스토리. 4년간 여러 영화사를 전전하며 불발 위기에 놓이기도. 결국 촬영 2주 전 신연식 감독이 영화사 루스이소니도스를 차리고, 이 영화를 창립작으로 직접 제작에 뛰어들었다. 36개의 적은 상영관에서 개봉해 관객 2만7000명 동원에 그쳤지만, 그가 독립영화의 자생 방법을 고민하는 데 결정적 동기를 부여했다.
러시안 소설신연식 감독 | 강신효, 경성환 | 2013 신 감독의 독립영화 실험 첫 신호탄. 식물인간 상태에서 27년 만에 깨어난 소설가(강신효)는, 그 사이 자신이 쓰지 않은 소설로 스타 작가가 됐음을 알고 배후를 캔다. “이래도 관객이 들까 싶을 만큼 소재, 이야기 구조, 제작 방식 모두 최악으로 상정했다”고. 국내외 영화제에서 호평받으며, 개봉 당시 6000명 남짓의 관객을 모았다. 3000만원 규모 영화치곤 예상 밖의 선전.
동주이준익 감독 | 강하늘, 박정민 | 2016 루스이소니도스가 제작한 여섯 번째 장편이자, 신 감독이 연출 아닌 각본과 제작에만 참여한 첫 작품. ‘사도’(2015) 등 시대극에 일가견 있는 이준익 감독의 연출력과 신 감독의 저예산 영화 제작 노하우가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며 관객 117만 명을 모았다. “‘1000만 영화’ 감독이 비상업적 목적과 가치로 손해 보지 않는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가이드가 나왔다”는 게 신 감독이 설명하는 의의.

신연식 감독의 '연기돌' 발굴, 다음 타자는?

신인 배우와 가수에게 연기를 가르치며 여러 아이돌 스타의 또 다른 재능을 발굴해 온 신연식 감독. “눈빛에서 갈등이 느껴지는 아이돌에게서 배우의 자질을 발견한다”는 그의 캐스팅이 가장 적중한 사례가 이준이다. 2013년 ‘배우는 배우다’의 주연으로 인정받은 이준은, 이듬해 엠블랙 탈퇴 후 전업 배우를 선언했다. 신 감독이 연기 수업 교본으로 쓰던 단편 ‘맥주 파는 아가씨’를 수록한 옴니버스영화 ‘프랑스 영화처럼’에서는, 씨스타 다솜과 포미닛 전지윤이 각각 호프집 아르바이트생과 엄마의 죽음을 맞닥뜨리는 딸로 출연해, 자연스러운 정극과 앙상블 연기를 선보였다. 옴니버스영화 ‘여자, 남자’(2015, 강진아·우문기·신연식 감독) 중 신 감독이 연출한 단편 ‘내 노래를 들어줘’에 나온 에프엑스 멤버 크리스탈. 그는 가수로서 본래 모습과 극 중 배역을 미묘하게 넘나드는 연기를 펼쳤다. 옴니버스 인권영화 ‘시선 사이’(6월 9일 개봉, 최익환·신연식·이광국 감독) 속 단편 ‘과대망상자(들)’에서는, 신화 김동완이 신 감독과 호흡을 맞춰 망상에 빠진 청년 역을 소화했다. 최근 신 감독이 “잘 맞는 작품을 만나면 폭발할 만한 에너지를 가졌다”며 눈독 들이고 있는 가수는? 바로 장재인이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사진=정경애(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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