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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작가전] 이야기 해줄까 #2. 미묘 - 바로 앞에 있다 (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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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어서 자네 손을…….”

구명 속의 남자가 손을 뻗었다.
죽은 나뭇가지처럼 마른 손가락들이 허공에 떠 있었다. 푸르스름한 달빛 속에서 묘는 미를 바라보았다. 미도 묘를 보았다. 그들이 수평의 시선이 된 건 오랜만이었다. 미가 묘의 등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묘는 도구가 되는 것을 찾았지만 얼어붙은 호수에 그런 게 있을 리 없음을 깨달았다. 더듬거려 주머니를 뒤져봐도 라이터와 담뱃갑뿐이었다. 구멍 주위로 어떻게라도 균열이 가 있을 것 거였다. 그럼에도 체온이 내려가 있을 남자를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다고 묘는 생각했다.

남자에게 다가간 묘가 한쪽 팔을 잡았다.
아무리 잡아끌어도 구멍에 꽉 낀 채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미를 돌아보았다. 그는 미동도 없이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잡아.”

“왜.”

미가 물었다. 묘는 잡았던 남자의 팔을 놓고 천천히 미에게로 걸어왔다.

“다시 말해봐.”

“가까이 가면 구멍이 더 크게 깨질지 몰라.”
미가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했다. 묘는 미의 말이 끝나자마자 헛웃음을 쳤다.

“잡아.”

묘의 눈에 묘한 광기 같은 게 어려 있다고 미는 생각했다. 그 눈을 피해 허공으로 치켜 오른 남자의 한쪽 다리를 바라보았다. 우스꽝스럽게 꽂힌 깃대 같다. 묘가 미의 팔을 낚아채듯 잡아끌었다.
남자의 등으로 돌아가 뒤에서 껴안듯 묘가 팔과 몸통을 잡았다. 미는 묘의 허리를 안은 채 엉덩이를 빼고 뒤쪽으로 당겼다. 흔들거리기만 할 뿐 남자는 좀체 구멍에서 빠지지 않았다.

“당겨!”

남자의 두 팔을 안은 묘가 돌아보며 소리쳤다. 미는 묘의 허리춤을 다시 단단하게 그러쥐었다. 이어 있는 힘껏 뒤로 잡아당겼다. 바람이 얼음 위를 훑어가며 우웅, 거대한 울림소리를 냈다.
미가 얼음 위에서 발이 삐끗 어긋난다고 느끼는 순간이었다.
쩌저저적, 소리와 함께 금이 가는가 싶더니 느닷없이 얼음판이 깨지며 밑으로 내려앉았다. 남자의 몸뚱이가 시커먼 물속으로 쑤욱 빨려들었다. 남자를 따라 묘의 팔과 머리가 순식간에 구멍 속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미는 너무 놀라 단단하게 잡았던 묘의 허리를 놓았고, 반동으로 비틀거리다 멀찌감치 나가 떨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직 남자를 잡고 있던 묘는 커다랗게 뚫린 구멍에 상반신을 박고 밖으로는 하반신이 걸쳐진 자세였다. 얼음판 위로 길게 뻗은 두 다리가 달빛 아래서 물고기처럼 파닥파닥 튀었다. 검은 물 위로 자잘한 거품방울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다시 생겨났다.
미는 파닥거리는 묘를 향해 무릎걸음으로 기었다.

“구멍 주위로는 가지 않았어야 했다. 내 말이 옳았다. 그런 적이 한두 번도 아니었는데 넌 언제나 네가 내키는 쪽으로만 움직였다.”
미는 묘의 다리가 파닥거리는 얼음판 위로 기어가며 쉬지 않고 중얼거렸다.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묘의 다리가 구멍 속으로 잠겨 들어가는 게 보였다. 미는 더 빨리 기었다. 짐승이 네 발로 뛰듯 미도 네 발로 뛰었다. 짐승이 저 호수의 눈바람처럼 울부짖듯 미도 울부짖었다.
미는 얼음판 위에 납작하게 엎드려 구멍 속을 들여다보았다. 거칠게 뱉은 숨이 하얀 입김으로 퍼져나갔다. 미는 주머니를 더듬거려 플래시를 꺼내 구멍을 비췄다. 갑자기 묘의 머리가 검은 물 위로 솟아올랐다. 미가 묘에게로 플래시 불빛을 옮겼다. 떨리는 손 때문인지 빛이 한곳으로 모이지 않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물속의 묘가 컥컥대며 숨을 몰아쉬었다. 불빛에 드러난 묘의 눈이 빨갰다. 볼도 코도 입도 빨갛지 않은 곳이 없었다. 미는 빛을 묘에게 맞춘 채 엉덩이를 밀며 다시 뒤쪽으로 기었다.

“플래시는 어디서 난 거야? 네가 가져온 거냐?”

묘는 두 팔을 내밀고 구멍 밖으로 나오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매번 미끄러져 물속으로 빨려들기만 했다. 묘는 이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물의 검은 구멍 속에 떠 있기로 했다. 미는 묘에게 불빛을 비춘 채로 쪼그려 앉았다. 묘의 머리에서 하얀 김이 피어오르며 플래시 빛줄기를 잡아당겼다.

“뭐 해. 나를 빨리 건져내야 할 거 아니냐.”

묘가 미를 향해 말했다. 묘는 자신을 비춘 불빛을 향해 한결 부드러운 표정이 되었다.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이상하게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지.”

미가 묘 쪽을 향해 천천히 무릎걸음으로 기기 시작했다. 플래시 불빛이 검은 허공으로 얼음판으로 사방으로 튀었다.

“어디 있는 거야?”

묘가 말했고 미는 움찔 자리에 멈췄다. 묘의 눈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왜 그래, 눈을 다친 거냐?”

미가 물었다.

“이상해. 앞이 잘 보이질 않는다.”

묘는 손으로 눈을 더듬고 싶었지만 팔을 계속 허우적거려야 했다. 물에 떠있기조차 힘겨웠다. 불빛이 어디서 비추는 것인지, 도대체 미가 어디 있는 것인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앞이 뿌옇기만 했다. 남자가 자신의 팔을 움켜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장면이 떠올랐다. 묘는 물속에 상반신을 담근 채 버둥거렸는데 그때 깨진 얼음조각들에 두 눈이 찔린 것도 같다. 묘는 남자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렸다. 때리고 또 때렸지만 물속에서 주먹은 느리기만 했고 남자는 묘를 놓아주지 않았다. 묘는 움켜쥔 남자의 손을 악을 쓰며 물었다. 남자가 한쪽 손을 떼자 힘껏 그를 밀쳐냈다. 초로의 남자는 호수의 빠른 흐름 속으로 떨어져 나갔다. 묘는 그렇게 구멍 위로 다시 솟을 수 있었다.

*

“네 앞에 있어. 바로 앞에 앉아 있다.”

미의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들려왔다.
바로 앞에 있다 했지만 묘가 느끼기에 미는 허공 어디쯤 떠 있었다.

“앞이 보이질 않아.”

묘가 어둠 속 어딘가에 대고 말했다. 온몸이 차가운 얼음덩어리라도 된 듯했다.

“그래, 알고 있다.”

묘는 미의 대답이 들리는 쪽으로 기우뚱하게 귀를 기울였다.

“도와줘.”

“당연하지.”

바람과 눈이 잦아든 호수는 잠시 고요했다. 묘는 그 고요 속에 미묘한 불안이 떠다니는 것을 느꼈다. 머리보다 심장이 먼저 그런 기운을 느끼며 예민하게 쿵쿵거렸다.

“그런데 말이다.”

미가 말했다. 그러고는 아무 말이 없다.
묘는 미의 말들을 기다렸다. 팔을 움직일 때마다 손가락이 떨어져나갈 듯 아팠다. 몸의 감각은 이미 사라져버렸는데도 손가락만은 살아 쿡쿡 찔러댔다. 묘는 그가 뱉어낼 다음 문장들을 기다리며 그동안 미가 자기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 생각했다. 미는 항상 만지작거리며 무언가를 만들어냈다. 밋밋했던 타일조각들에 작은 그림들을 그린다든지, 묘한 형상의 돌조각이라든지. 미의 손가락은 쉬지 않고 무언가를 만들어냈으며 그것들은 충분히 매혹적이었다. 하지만 묘의 눈에는 쓸모없거나 쓸데없는 것들에 불과했다. 목숨을 살아가는 데 필요하지 않은 것들. 미의 즉흥적인 세계는 순간 아름다울 수 있지만 안정감이나 평온을 가져다주지는 못한다. 묘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은 흐트러지지 않는 질서나 안정, 그리고 그것에서 비롯되었을 평온함이었다. 충동적이거나 즉흥적이지 않으며 계획적인 균형의 뜻이었다. 묘의 생각에 미는 감정을 절제하지 못해 스스로 자신 안의 바다를 휘저어버리는 사람이었다. 미의 감성적인 세계는 매번 불안했으므로 묘는 그런 미를 미워하고 부정했다. 그랬을 것이다.

“왜 그랬냐.”

“뭐?”

“왜 그랬냐. 정말 왜 그랬냐. 하지만 난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다. 그때 물었어야 했다.”

“뭘 말이야?”

“왜 그랬을까. 아아, 나는 정말 왜 묻지 않았을까.”
미가 어둠 속 어딘가에서 말했다.

“언제?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몰라서 묻는 거냐? 진짜 모른다는 거냐?”

“매…맹세해.”
묘의 입에서 치아들이 딱딱 부딪치는 소리를 냈다. 부들부들 떨며 두 팔을 다시 얼음판 위로 올려놓았다. 젖은 점퍼 속으로 상상하지 못했던 차가움이 전해져왔다.

“그럼 넌 그 속에 조금 더 있어야겠다.”

미가 말했다.

“무슨 소리야?”

“몸이 곧 싸늘하게 식을 수도 있겠지만 언제나 이렇게 내가 여기에 있으니 괜찮다.”
묘는 온몸을 떨며 두 발로 물을 휘저었다. 호수의 물살에 휩쓸려가지 않으려면 잠시라도 멈출 수 없었다. 호흡이 가빠지며 입술 사이로 거친 숨소리가 터져나왔다. 잇몸이 덜덜 떨리고 관자놀이 부분까지 지끈거리는 통증이 이어지고 있었다.
입을 다문 미와 구멍 속의 묘와 적당히 작아진 달의 빛과 사방으로 흐르는 물소리만 있었다. 아무것도 없이 멈춰 있는 듯 보였던 물의 수많은 결들이 계속 어느 방향인가로 흘러가고 있을 거였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묘는 그 일이 새삼스러웠다. 관자놀이가 벌어질 것처럼 뻐근한 통증이 계속 되는데도 묘는 생각해보려 안간힘을 썼다.

“왜 그랬냐. 정말 왜 그랬냐.”

미의 목소리에 절망의 빛이 묻어있음을 묘는 알아차렸다.
무얼 묻는 것일까. 미는 알고 있지만 자기가 모르는 게 무엇일까. 묘는 생각하고 생각했다. 미는 분명 무언가를 물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내려 해도 답을 모르겠다. 다만 깊숙한 어느 곳에선가 피어오르는 짐작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짐작은 짐작일 뿐 명확하게 알 수는 없었다.


작가 소개    
동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9년, 단편 『아칸소스테가』로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등단.
창작소설집 『마리 오 정원』
테마소설집 『2012신예작가』
12월 테마소설집 출간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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