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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첫 대북 응징’ 몽금포 작전 이끈 제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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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서해 백령도에서 북동쪽으로 22㎞ 떨어진 황해남도 용연군 몽금포. 민요 몽금포타령으로도 유명한 몽금포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다음해인 1949년 8월 17일 한국군이 처음으로 대북 응징 보복작전을 펼친 곳이다. 당시 작전을 지휘했던 함명수(사진) 전 해군참모총장이 23일 별세했다. 88세.

함명수 전 해군참모총장 별세
1949년 북한 경비정 4척 격침
인천상륙작전 성공에도 한몫

1928년 평양에서 태어난 고인은 47년 해군사관학교 1기생으로 임관했다. 이후 충무공정 정장과 호위함인 임진강함 함장, 제1전단 사령관, 작전참모부장, 한국함대사령관을 거쳐 7대 해군참모총장을 지냈다. 66년 해군 중장으로 전역 후엔 수산개발공사 사장과 국영기업이었던 한영공업주식회사(현 효성중공업) 사장, 9·10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군에선 고인을 ‘몽금포 작전의 주인공’으로 평가한다. 해군본부 정보감(당시 소령)으로 근무했던 고인은 49년 8월 10일 해군 인천경비부가 관리하던 주한 미 군사고문단장 윌리엄 로버트 준장의 전용 보트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고인과 사관학교 동기생이자 당시 작전에 함께 나섰던 공정식 전 해병대 사령관은 “로버트 준장 보트가 북으로 갔다는 소식을 들은 이승만 대통령은 ‘동해에서는 태극기를 단 함정이 올라가고(당시 좌익성향 승조원들이 해군 함정 4척을 몰고 월북), 서해에서는 성조기를 단 보트가 올라가고…. 이래서 되겠는가’라고 역정을 냈다”며 “함명수 소령이 보복작전을 제안해 실행에 옮기게 됐다”고 회고했다.

몽금포 작전은 북한 경비정 4척을 격침하고, 1척을 나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그동안 부각되지 않았다. 북한 도발에 대한 응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이를 남북의 경계선을 넘은 월경(越境)사건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지난 여름 개봉됐던 영화 ‘인천상륙작전’의 모티브가 된 ‘X-Ray 작전’에서도 그의 역할이 컸다. 고인은 6·25전쟁의 전세를 뒤집기 위한 인천상륙작전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라는 지시를 받고, 첩보대를 조직해 한 달 동안 수집한 정보를 연합군에 전달했다.

최태복 해군 정훈공보실장은 “고인은 영원한 바다사나이”라며 “해군은 2008년 건군 60년을 맞아 ‘군인정신의 표상’으로 존경받는 명장(名將) 18명 중 1명으로 고인을 선정했다”고 말했다.

장례식은 해군장으로 치러지며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영결식은 26일 오전 7시. 010-6204-4722.

정용수 기자 nky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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