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주의 지지" 트럼프와 상반된 메르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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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방과 포용, 그리고 자유무역.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23일 연방하원 정책토론회 연설에서 내보인 메시지다. 총리 4선 도전을 선언한 그로선 첫 주요 연설이었다. 그는 이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을 거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메시지 때문에 언론들은 “트럼프와 대조되는 입장을 내보이며 선거운동을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그는 테러·이민·세계화에 대한 일반인들의 우려에 공감했다. 그리곤이민정책부터 복지까지 안전과 자유를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우리는 세계화의 모습을 만들어 가는데 있어서 다자주의를 지지해야 한다”며 “나도 그러겠다”고 말했다. 반이민·반EU의 극우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국경 봉쇄를 주장하는 걸 의식해 “개방이 고립보다 더 안전을 보장해준다”고 반박했다.

메르켈 총리는근래 ‘서구 자유주의의 수호자’로 불리곤 한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나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으로 이어진 포퓰리스트(대중 인기영합주의자)들의 기세에 맞설 거의 유일한 인물이란 얘기다. 실제 트럼프의 당선이 확정된 이후 의례적인 축하 논평을 내놓는 대신 “미국과 독일은 인간에 대한 존엄, 민주주의·자유, 법에 의한 지배 등 가치를 함께 한다. 이를 바탕으로 긴밀하게 일하게 되길 바란다”고 했다. 그러나 그 역시 자국 내에서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으로부터 거센 도전을 받고 있다집권당 인사들이“메르켈 없이 선거에서 이길 수 없지만, 메르켈과 함께 하더라도 어려운 선거가 될 것”이라고 할 정도다파이낸셜타임스는 “이번 연설은 보수 진영에 대한 지지를 되찾기 위한 것”이라고 전했다.

메르켈 총리는 트럼프 당선인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TP) 탈퇴 입장에 대해선 실망감을 드러냈다. 그는 “TTP가 현실화하지 않을 수도 있어서 썩 좋진 않다”며 “누가 거기서 이익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한 가지는 앞으로도 다른 무역협정이 체결되겠지만, 그것은 TPP나 범대서양무역투자동반자협정(TTIP, 미·EU의 자유무역협정)의 기준과는 다르리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국이 빠진 세계 무역 시장에서 중국이 최대 수혜자가 될 것을 경계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메르켈 총리는 트럼프가 승리한요인 중에 ‘가짜 뉴스’ 덕분이란 분석도 의식했다. 극우파가 만들어내고 소셜미디어를통해 유통되는 시스템 말이다. 그는“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정치적) 논쟁은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서 일어나고 있다”며 “25년 전과 같은 방식으로 여론이 형성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오늘날에는 가짜 사이트나 봇(bot), 악성 게시물을 올리는 사람 등이 특정 알고리즘으로 자기 복제를 하며 여론을 강화하고 있다”며 “우리가 이 문제를 다루려면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스트리아도 EU 탈퇴 국민투표 검토”=독일의 이웃나라인 오스트리아에선 다음 달 4일 대통령 결선투표를 앞두고 강세를 보이는 극우정당인 자유당의 노르베르트 호퍼 후보가 “EU가 브렉시트에 대한 반응으로 더욱 중앙집권화한다면 오스트리아는 (EU 탈퇴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얼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스트리아 대통령은 상징적 지위이긴 하지만 하원 해산권이 있다. 그가 당선되면 2차 세계대전 이후 서유럽 지도자 중 최초로 선출된 극우 지도자가 된다. 오스트리아에선 5월 대선 결선투표가 있었으나 개표 부정으로 12월 재선거를 치르게 됐다.

런던=고정애 특파원 ockh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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