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어린이 차지|엄마 아빠와 함께 보는 페이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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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반장이 되면 모두 제 말을 잘들을테니 기분이 좋겠지요. 선생님 심부름도 많이 할수 있고요.』
『반장이 되면 누구나 알아주잖아요.』
『공부만 잘해서는 안되고 친구들 사이에 인기도 좋아야 반장으로 뽑힐 테니까 반장이 되면 얼마나 신나겠어요.』
반장이 되고싶은 어린이는 수없이 많다. 각 학교마다 반장선거가 한창인 요즘 서울YMCA가 지난 7∼8일 마련한 「제5회 어린이 민주시민 지도력 훈련」의 참가자만해도 약1백20명. 심지어 오빠 이태원군(서울 일원국교4)과 함께 온 이수왕양(일원국 1)처럼 『앞으로 어떻게 해야 반장이 될 수 있는지 미리 배워두려고』참가한 1∼2학년 어린이들도 심심치않게 눈에 띄었다. 반장을 꿈꾸는 어린이들 중에는 국민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반장이 되기 위한 준비를 서두르기도 하는 것.
이런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외에도 『말을 잘해야 반장이 되는데 유리하대서 웅변학원에 다녀요』라거나 『반장선거날 친구들 앞에서 발표할 이야기를 글로 써서 녹음해 보며 연습중』이라는 등 어린이들의 반장이 되기 위한 노력은 놀라울 정도다.
이미 반장으로 뽑혔지만 앞으로 어떻게 해야 「좋은 반장」이 될 수 있는지를 배우려고 이 프로그램에 참가했다는 김대중군(서울 명지국4)에 따르면 『친구들한테 떡볶이·햄버거 ·아이스크림·노트나 연필같은 걸 사주면서 「한표」를 부탁하는 아이들도 꽤 많은 편』이라고. 『그렇지만 저처럼 그런거 사주지 않고도 반장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덧붙인다.
그런가하면 윤주영(서울 양화국6)·주호(양화국4)군 형제를 데리고 이 프로그램에 참가한 어머니 서정숙씨(32)처럼 반장선거에 대해 자녀못지 않게 열심인 어머니들도 있다. 큰아들인주영군 자신은 『이미 여러차레 반장을 해봤으니까 이젠 조용히 공부나 하고싶은 마음』이라는데 어머니는 올해도 반장이 되기를 바란다는 것.
『아이들은 젊고 예쁘고 친절한 엄마를 부러워하기 때문에 아들 친구들이 집에 놀러오면 한껏 맵시를 내고 맛있는 음식도 대접하는 등 신경쓸 일이 많죠』라는 서씨는 『반장이 되고 나도 같은반 어린이 모두에게 빵과 음료를 봉지에 담아 나눠주는 등 뒷바라지할게 많지만 역시 즐거운 일이죠』라며 웃는다.
이 프로그램에 「예비반장교실」이란 부제가 붙어있듯이 반장의 자질이란 민주적 지도력과도 통한다. 따라서 이틀동안 계속된 이「예비반장교실」에서는 반지르르한 말솜씨나 인심사는 법이 아니라 자연을 사랑하는 어린이, 모범적인 학교생활, 회의를 이끄는 법, 가정생활, 철학교육 등에 대한 강의와 토론을 통해 민주적인 생각과 태도 및 지도력의 중요성이 거듭 강조됐다.
지난12일 반장선거를 치른 서울신명국민학교 5학년2반 교실. 선거진행 및 투표용지 점검 등을 위해 4명의 어린이가 선거관리위원으로 뽑혔다.
4학년때의 성적에 따라 이틀전 담임 하광백 교사가 추천한 14명 가운데 반장입후보자 등록을 마진 어린이는 13명. 입후보자들은 의견발표순서를 정하기 위해 우선 제비뽑기로 기호를 정했다.
기호번호대로 의견발표에 나선 입후보자들의 「선거공약」은 각양각색.
『여러분의 손발이 되어 전교 최고의 반으로 이끌겠습니다.』
『유머감각이 풍부하신 담임선생님을 도와 우리반에 항상 웃음꽃이 피게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다정한 친구인 저를 반장으로 뻥 쏘아올려주세요.』
『여러분, 저처럼 늘씬한 꺽다리는 시원시원해서 좋지요. 진실한 심부름꾼이 되는데 굳이 남자 여자를 따질 필요는 없다고 믿습니다. 여러분이 반장으로 뽑아주신다면 전교 부회장에도 출마해서…』
모두들 진지하게 귀기울이다가 한 여자어린이가 TV 코미디프로의 유행어를 흉내내며 『제가 만일 반장에 당선된다면 여러분, 어때요?』하자 모두들 『좋습니다!』하며 폭소를 터뜨리기도 했다.
의견발표가 끝난뒤 가슴에다 각자의 이름을 큼직하게 써 붙이고 나와 간단한 자기소개를 마치자 이어 반장투표순서 담임 교사의 도장이 찍힌 투표용지에다 남이 볼세라 숨기면서 이름을 쓴뒤 한데 모아 개표를 시작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친구의 표가 나올때마다 어린이들은 좋아라고 외치며 박수를 치는 등 온통 흥분의 도가니. 부반장 선거까지 마친 뒤에는 어린이들의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무궁화」노래를 합창하며 「선거열기」를 식혀야 할 정도였다.
반장이나 부반장으로 뽑히지 못한 어린이들은 눈자위를 붉히는 등 섭섭한 마음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고맙습니다. 앞으로 여러분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는 반장-부반장의 인사에 모두를 힘찬 박수. 어린「민주시민」들의 반장선거는 이렇게 끝났다. <김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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