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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NG] “흉년이 들어도 만석이 난다더니” 동학농민운동 발자취따라 정읍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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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바울·연성현

어느덧 가을도 추수도 끝나가고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농촌에서는 한 해 수확한 곡식을 정리할 때이다. 하지만 약 120년 전쯤 정읍의 농민들은 이맘때 그러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먹을 곡식이 없어 허덕였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켰다. 정읍에서 그들의 발자취를 살펴보도록 하자.

1. 만석보 유지비

만석보유지비. 고부농민봉기의 원인이 되었던 만석보가 있던 자리에 서 있다.

만석보유지비. 고부농민봉기의 원인이 되었던 만석보가 있던 자리에 서 있다.

1892년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농민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징수하고 백성들에게 거짓 죄명을 씌어 2만냥이 넘는 돈을 거두는 등 엄청난 수탈을 일삼았다. 그리고 농민들이 정읍천 하류에 사용하던 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흉년이 들어도 만석이 난다’는 이름의 만석보를 쌓고 거기서 물세를 거두어들였다.

다음해 극심한 흉년이 들어 40여 명의 농민이 물세 감면을 하소연하였지만, 이들을 백성을 선동하는 난민이라 칭하며 그 중 전창혁·정익서·김도삼 세 사람을 체포했다. 그 중 전창혁이 전봉준 장군의 아버지이다.

이에 전봉준 등 20여명은 송두호의 집에 모여 조병갑을 비롯한 탐관오리를 처단하고 전주성을 함락한 후 한양으로 진격한다는 사발통문을 결의하였다. 하지만 고부 고을의 민심이 어수선해지자 조정에서는 조병갑을 익산 군수로 발령했다. 그로 인해 사발통문 거사 계획은 보류되었다.

2. 말목장터와 만석보 혁파비

말목장터 비석. 전봉준이 1894년 1월 10일 봉기를 선언하고 수많은 농민들이 모였던 말목장터.

말목장터 비석. 전봉준이 1894년 1월 10일 봉기를 선언하고 수많은 농민들이 모였던 말목장터.

만석보 혁파비. 농민 봉기 후에 만석보를 헐어버리고 예동마을에 세운 만석보 혁파비.

만석보 혁파비. 농민 봉기 후에 만석보를 헐어버리고 예동마을에 세운 만석보 혁파비.

전봉준이 봉기를 일으킨 원인은 조병갑의 복귀였다. 고부의 성난 민심 때문에 조병갑은 익산군수로 발령이 났지만, 중앙에 손을 써 고부를 떠나지 않으려 했다. 결국 1894년 1월 9일자로 다시 조병갑은 고부군수로 발령을 받았다. 이 소식을 들은 전봉준은 1월 10일 새벽 말목장터 감나무 아래에서 농민들을 모아 봉기를 일으켰고, 고부 관아를 공격해 점령하였다. 옥을 부수고 죄 없는 농민들을 풀어줬으며, 곳간을 열어 곡식들을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마지막으로는 만석보를 허물고 예동마을에 만석보 혁파비를 세웠다.

만석보 혁파비는 현재 비바람에 씻겨 비문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지역민의 건의에 따라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비각을 건립하게 됬다. 또한 말목장터의 감나무는 그 후 100년 이상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나, 2003년에 고사하여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보존·전시 되어있다. 현재는 다른 감나무를 그 자리에 심어 놓은 상태다.

3. 황토현 전적지와 동학농민혁명 기념관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은 황토현 전적지에 위치하고 있다. 황토현 전투는 관군과의 첫 전투이자, 최대의 승전이었다. 황토현 전투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백산 봉기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1894년 3월 하순·태인·부안·고창 등의 여러 접주들이 병력을 이끌고 백산에 모였다. 거기서 그들은 제폭구민과 보국안민을 내세우며 봉기를 일으켰다.

이때 전봉준은 총대장으로 손화중과 김개남은 총관령으로 추대되어 농민군을 이끌었다. 동학농민군이 백산에서 봉기한 것을 알게 된 조정은 관군을 소집하고, 농민군 토벌에 나섰다. 그렇게 토벌에 나선 조정 군을 막기 위해 농민 군은 만반의 준비를 했다. 쳐들어온 관군을 1894년 4월 6일 저녁에 황토현으로 유인하였고, 다음날 기습공격을 온 관군에게 매복 작전으로 대승을 거두었다.

4. 전봉준 고택과 전봉준 장군 단소

전봉준 장군 고택.

전봉준 장군 고택.

전봉준 장군 단소.

전봉준 장군 단소.

전봉준 장군은 1855년에 태어났다. 전봉준 장군의 생가터는 고창에 있다. 하지만 그는 여러 지도자들을 찾아다니며 이사를 많이 다녔기 때문에 동학농민혁명 당시 그가 살던 집은 정읍에 있다. 이 집은 1974년에 복원되었고, 그 앞에는 그가 살던 당시 쓰던 우물이 아직도 있다.

전봉준 장군은 고부지방의 동학 접주였다. 그래서 1893년 12월 고부 관아에 진정하였을 때에도 그는 장두(여러 사람이 서명한 소장의 첫머리에 이름을 적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진정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쫓겨났다. 그는 동지들을 모아 사발통문을 작성하고 거사를 일으킬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이듬해 고부 봉기를 일으켜 조병갑을 몰아내고 곳간을 털어 곡식들을 백성들에게 나누어준다.

조정에서는 이를 수습하기 위해, 장흥 부사 이용태를 안핵사로 삼았다. 하지만 안핵사로 온 이용태가 농민들을 수탈하고 악랄한 행동을 일삼자, 전봉준은 백산에서 김개남·손화중 등의 동지들과 봉기를 일으켰다. 1894년 4월 4일 고창을 점령하고, 4월 7일에는 황토현에서 관군을 대파하였다. 결국 4월 27일에는 전라도의 중심지인 전주를 점령하였다. 이후 폐정 개혁안을 내놓았고, 정부가 이를 수용하면서 전주 화약이 맺어졌다.

이후 동학농민군은 해체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청일 전쟁이 일어나자 다시 모이게 된다. 하지만 몇 번의 전투 끝에 결국 우금치에서 대패하게 되고, 전봉준은 순창에서 부하 김경천의 밀고로 잡히고, 결국 사형 당한다.

수많은 농민들의 외침이 담겨있는 정읍.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배우고, 불의에 맞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좋을지 생각하게 하는 곳인 것 같다.

글=정바울(전북사대부고 2), 사진=연성현(전북사대부고 2) TONG청소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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