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 안 놓겠다는 대통령…야당 “청와대가 탄핵 유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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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16일 부산 해운대 엘시티 사건의 철저한 수사를 지시한 것은 지난달 25일 1차 대국민 사과 이후 처음으로 정부 부처에 내린 행정 지시다. 야당에서 퇴진을 요구하는 상황 속에서도 박 대통령은 특유의 ‘정면돌파’ 쪽으로 가닥을 잡은 양상이다. 박 대통령의 정국 수습책은 지난 8일 정세균 국회의장에게 밝힌 ‘총리 지명권 국회 이양’에서 더 나가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한때 청와대에선 새누리당 탈당과 내·외치를 모두 포기하는 2선 후퇴 카드도 검토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가 영수회담을 철회하고, 민주당이 대통령 퇴진을 당론으로 확정하자 박 대통령도 더는 밀릴 수 없다고 판단했다는 관측이 나온다. 한광옥 대통령비서실장은 이날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국정에 공백이 생겨선 안 된다는 것”이라며 “헌법에 위배되는 절차나 결정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탄핵 국회 통과돼도 확정까지 먼길
전열 정비 후 대선 준비시간 벌어

청와대가 퇴진 요구에 버티기로 나가면 국회에선 결국 탄핵 카드를 뽑아들 수밖에 없다. 심지어 “청와대와 친박계가 탄핵을 원한다”는 말까지 나온다.

박 대통령에게 탄핵은 다목적 카드다. 먼저 검찰 수사에서 박 대통령에 대한 혐의를 확실하게 입증하지 못하거나 탄핵 과정에서 박 대통령의 지지층이 재결집할 경우 야권은 역풍에 휘말릴 수 있다.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해도 헌법재판소의 최종 결정까지는 최장 6개월이 걸린다. 그사이 벌어질 정국 혼란에 대한 책임을 야당이 짊어져야 할 수도 있다. 헌재에서 탄핵안이 부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설령 탄핵이 확정되더라도 그만큼 여권이 시간을 벌 수 있기 때문에 지금보다는 전열을 수습해 차기 대선에 임할 수 있다. 여권 관계자는 “지금 박 대통령이 퇴진하면 두 달 뒤에 대선을 치러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대선 출마 기회조차 없어진다”고 말했다.

새누리당 당대표 및 최고위원·중진 의원 연석 간담회가 16일 오전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열렸다. 홍문종·최경환·조경태·정우택 의원(왼쪽부터)이 심각한 표정으로 이주영 의원의 발언을 듣고 있다. [사진 박종근 기자]

새누리당 당대표 및 최고위원·중진 의원 연석 간담회가 16일 오전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열렸다. 홍문종·최경환·조경태·정우택 의원(왼쪽부터)이 심각한 표정으로 이주영 의원의 발언을 듣고 있다. [사진 박종근 기자]

청와대와 함께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와 친박계의 태도도 강경해졌다. 이 대표는 전날 ‘지지율 10%도 안 되는 사람들’이라고 비주류 대선 주자들을 공격한 데 이어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김무성 전 대표 등 비주류 다선 의원들을 겨냥해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 정치’의 전형적인 사고가 몸에 익숙해 핏속까지 그 행태가 흐른다”고 주장했다.

친박계 핵심인 최경환 의원도 최고위원·중진 연석회의에서 “지도부가 대안 없이 물러나는 것은 무책임하다”며 이 대표에게 힘을 실었다. 반면 비주류 측인 ‘비상시국위원회’는 박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와 관련, “국민께 이미 약속한 대로 적극적이고 즉각적으로 수사에 임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야권은 대통령의 의도를 ‘탄핵 유도’라고 읽으면서 아직까진 자진 사퇴 압박만 강화하고 있다.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는 이날 대통령의 수사 연기 요청에 대해 “정말 제정신인가 묻고 싶다. 촛불 민심에 기름을 붓는 결과가 될 것”이라며 퇴진을 거듭 촉구했다. 국민의당 박지원 비대위원장도 “청와대가 ‘탄핵을 할 테면 해 보라’며 탄핵을 유도하고 있다”며 “대통령과 청와대는 역천자(逆天者)의 말로를 생각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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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당 안철수 전 대표도 이날 기자회견을 열어 “(검찰 조사 회피는 최순실씨) 공소장에 대통령 진술이 포함되는 것을 피하려는 속셈”이라며 “공소장은 (불법이 적시될 경우) 탄핵소추를 결정할 핵심 근거인데, (박 대통령은) 스스로 물러날 생각은커녕 탄핵에 대비한 준비 작업에 착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날 민주당 주최 토론회에서도 대통령 탄핵을 놓고 논란이 벌어졌다. 추미애 대표는 토론회에서 “이미 드러난 사실만으로도 탄핵 사유가 충분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조국 교수는 “정치적 탄핵과 ‘법적 탄핵’은 다르다. 현행법상 탄핵소추위원을 법사위원장인 새누리당 권성동 의원이 맡고, 헌재에서 탄핵 절차가 얼마 동안 지속될지도 알 수 없다”며 부정적 의견을 보였다.

글=김정하·강태화 기자 wormhole@joongang.co.kr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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