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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인의 광기, 평화로운 세상 뒤흔들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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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5호 14면

아서 밀러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 엄청난 악행을 저지를 때,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그런 일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온갖 범죄와 악행을 저지르고도 남을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정상인의 은밀한 광기’다. 정신분석학자 멜라니 클라인은 말한다. 정상적인 사람도 어느 정도 정신병적 기질을 갖고 있다고. 그 영향은 행동이나 성격으로 드러나는데, 우리가 저 사람은 ‘히스테리컬’하다거나 또는 ‘조울증 기질’이 있다는 식으로 표현할 때 어느 정도는 정상인 속에 내재하는 광기를 가리키는 셈이다.


그런데 정상인의 광기는 ‘건강한 상식’과 ‘합리적인 이성’으로 통제가 가능하다. 문제는 이런 정상인의 광기가 집단화될 때, 바로 히틀러의 파시즘이나 중세의 마녀사냥 같은 잔혹한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는 점이다. 즉 파시즘이나 대학살은 몇몇 광기 어린 지배자의 일탈 행동이 아니라 그 광기에 적극적으로 또는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수많은 ‘정상적인 대중’을 통해 발현되는 것이다.


인기 작가는 바로 이런, 정상적인 사람들의 마음속에 내재하는 은밀한 광기에 주목했다. 그가 원래 암묵적으로 겨냥했던 것은 1950년대 미국 사회의 매카시즘이었다. 당시 미국의 극우 정치인들이 반대파 숙청의 근거로 “공산주의자다!”라는 낙인을 악랄하게 활용하고 있을 때,는 매카시즘으로 예술가들의 자유가 박탈당하는 것을 경계했다. 『어느 세일즈맨의 죽음』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던 자신도 이 작품이 “마르크시스트의 선전물”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매카시즘적인 비평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처럼 미국 사회에 집단화된 매카시즘의 광기를 1692년 매사추세츠 세일럼에서 일어난 마녀사냥을 통해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작품이 바로 『시련』이다.


17세기 말 매사추세츠 주 세일럼에 부임한 패리스 목사의 조카 애비게일은 유부남 존 프록터를 향한 사랑으로 괴로워한다. 두 사람은 비밀스러운 만남을 일시적으로 가졌지만, 존은 아내 엘리자베스에 대한 사랑과 가정을 지키고 싶은 마음으로 애비게일을 멀리하고, 애비게일은 엘리자베스를 향한 질투심에 괴로워한다. 그러던 어느 날 패리스 목사가 동네 소녀들이 한밤중에 모여 광란의 춤을 추며 밀교적 분위기의 비밀의식을 벌이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면서 조용했던 세일럼에 본격적인 마녀 재판이 시작된다.


패리스 목사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과 권위를 이용해 마을 전체를 마녀 사냥의 분위기로 몰아가기 시작한다. ‘마녀’로 지목된 사람은 실제로 사형을 당하는 이 잔혹함 속에서,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양심을 저버리고 거짓 증언까지 하기 시작한다. 엄격한 청교도적 분위기가 지배하던 17세기 말의 세일럼에서 소녀들이 벌인 한밤중의 일탈은 심각한 사건이었고, 목사가 계속 협박하고 추궁하자 이 소녀들의 리더였던 애비게일은 “악마의 영혼이 시켰다”는 거짓 자백을 하고 만다.

영화 ‘시련’

[마녀 사냥 희생자는 상식과 양심을 지키는 이들]


바로 이 위험한 추궁과 거짓 자백으로 인해 사건은 일파만파로 번지게 되고, 사람들은 자신의 권한이나 이익이 충돌하는 사람들을 ‘악마의 시녀’나 ‘사탄의 영혼’으로 지목하기 시작한다. 평소 원한을 사고 있는 사람들과 질투를 받던 사람들이 모두 마녀사냥의 희생 제물로 바쳐질 위험에 놓인 것이다. 존 프록터에 대한 사랑과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에 대한 질투로 괴로워하던 애비게일은 마침내 엘리자베스를 ‘마녀’로 지목한다.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평소의 원한이나 증오를 불쏘시개로 삼아 ‘마녀사냥’이라는 광기 어린 도가니 속에 던져 버림으로써 자신들의 잘못된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이른다. 종교의 이름으로 권력을 휘두르는 목사와 재판관들의 그릇된 권위의식, 사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그 분위기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의 집단적 광기 때문에 정작 희생당하는 사람들은 ‘상식과 양심을 지키는 사람들’이었다. 무려 열아홉 명의 죄 없는 사람들이 ‘악마의 영혼’으로 지목되어 사형에 처해진다. 마녀 또는 악마로 지목된 이들은 마을에서 가장 힘없는 사람들이었고, ‘다른 사람을 악마의 영혼으로 지목하지 않은 죄’로 자신이 그 죄 아닌 죄를 뒤집어쓴다.


주인공 존 프록터는 여기서 피할 수 없는 생사의 기로에 선다. 자신이 ‘살아남는 길’을 택한다면 아내가 악마라는 거짓증언을 해야 하고, 꾸밈없이 진실을 말한다면 ‘죽더라도 양심을 지키는 길’을 걸을 수 있다. 마침내 존은 죽는 한이 있어도 양심의 길을 따르기로 결정한다. 존은 아내 엘리자베스를 살리기 위해 자신이 애비게일과 불륜을 벌인 사실까지 고백하여 애비게일의 거짓 증언을 밝혀내려 하지만, 그는 결국 아내도 살리지 못하고 자신 또한 처형을 당하게 되고 만다.


『시련』은 사악한 집단에 맞선 윤리적 개인의 투쟁을 그린다. 마녀 사냥이라는 광기에 휩쓸려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최소한의 판단력마저 잃어버린 마을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주인공은 어떻게든 양심과 상식, 그리고 이성적 판단을 유지하려고 몸부림친다. 무사히 살아남기 위해서는 바로 그 집단의 광기를 받아들이고 인정해야만 한다. 그래야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찍히지 않으니까.


하지만 존은 끝내 목숨을 걸고 양심을 지켰고, 그럼으로써 ‘인간의 길’을 지켜낼 수 있었다. 굳이 히틀러와 나치즘의 사례까지 갈 필요도 없다.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빨갱이나 공산주의자라고 몰아세우며 선거 때마다 색깔론을 들먹이는 사람들이야말로 정상적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극우적 광기를 보여 준다.는 ‘공산주의자 친구들’을 밝히라는 매카시즘의 광기 속에서도 친구들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았다. 당시 영화감독으로서 엄청난 명성을 누렸던 엘리아 카잔은 1930년대 공산당 활동을 했던 여덟 명의 친구 이름을 발설함으로써 일신의 안위를 지켰고, 한때 그의 절친한 벗이었던는 친구의 배신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찰리 채플린마저도 매카시즘의 광풍에 밀려나 스위스로 쫓기듯 떠나야 했던 그 시절. 성공하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친구가 친구를 밀고하던 그 시절, 당시 마릴린 먼로는의 실제 연인이었다. 마릴린 먼로는의 편에 서면 자신까지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아서의 재판 비용까지 대며 그의 양심을 옹호했다. 『시련』의 존 프록터처럼 작가는 끝까지 양심을 지켰고, ‘다른 이를 악마로 지목함으로써 더 무서운 악마가 되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마릴린 먼로, 재판 비용 대며 밀러 옹호]


평소에는 ‘이성’의 힘으로 통제되고 은폐되는 은밀한 광기가 어떤 강력한 외적인 계기를 만나면 폭발할 수 있다. 우리 마음속에서 잠자고 있던 원시적이고 비이성적인 광기가 폭발하지 않도록, 지성의 힘과 이성의 통제력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예술과 지식의 힘은 바로 이런 집단적 광기가 폭발할 때 더욱 절실해진다.


일상의 광기, 정상인의 광기는 아주 은밀한 형태로 공기처럼 우리의 곁을 떠돌고 있다. 정권에 비판적인 문화예술인들을 색출해 비밀스럽게 때로 공공연하게 차별해 온 ‘문화계의 블랙리스트’가 화제로 떠오르는 요즘, 바로 그런 ‘일상의 광기’, ‘정상적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광기’가 무고한 예술가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더욱 뼈저리게 느낀다. 때로는 멋진 영웅이 되는 것보다 ‘악마가 되지 않는 것’이 훨씬 어려울 때가 있다. 어떤 마녀사냥의 광풍이 불어 닥친다 할지라도, 부디 우리를 지켜주는 것은 양심과 정의, 나아가 지성과 예술의 힘이 되기를. ●


정여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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