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먼, 첸쉐썬에게 “작은 걸음으로는 창신 불가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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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5호 28면

1 상하이 교통대학 재학시절 고향을 찾은 첸쉐썬(맨왼쪽). 부모(왼쪽 둘째와 셋째)와 조모(오른쪽 둘째)를 만났다. 1931년 4월 항저우.

고등학교 시절, 첸쉐썬(錢學森·전학삼)은 국부 쑨원(孫文·손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쑨원은 중국이 쇠퇴한 원인이 교통 때문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중국이 부흥하려면 교통이 발달해야 한다. 철도는 인체의 혈관과 같다.” 당시 중국은 철도 기술자가 부족했다. 우수한 학생들이 교통대학으로 몰렸다.


첸쉐썬도 철도 공정사가 꿈이었다. 교통대학 기계공정학원에 입학했다. 3학년 때 일본군이 만주를 점령했다. 국민정부가 저항을 포기하자 전국의 대학이 술렁거렸다. 교통대학도 정부의 출병을 촉구하기 위해 수도 난징에 파견할 청원단을 조직했다. 첸쉐썬은 하모니카를 들고 참여했다. 난징 구경만 실컷 하고 돌아왔다.


1932년 1월, 상하이 사변이 발발했다. 첸쉐썬은 일본군 전폭기의 폭탄 투하를 여러 차례 목격했다. 충격이 컸다. 철도보다 항공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서관에 있는 항공 관련 책을 깡그리 독파했다. 진로를 상의하기 위해 장바이리(蔣百里·장백리)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허사였다. 후난(湖南)에서 장제스(蔣介石·장개석) 정권 전복을 기도하던 장바이리는 기병에 실패, 국가 전복 혐의로 수감 중이었다.

2 첸쉐썬은 카먼(뒷줄 왼쪽 넷째) 남매와 가까웠다. 남매도 중국 유학생들과 자주 어울렸다. [사진 김명호 제공]

[공기역학 권위자 카먼 만난 첸쉐썬]첸쉐썬은 항공학을 하기로 결심했다. 대학을 1등으로 졸업하자 미국 관비유학생 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아버지 첸쥔푸(錢均夫·전균부)는 아들의 선택에 토를 달지 않았다. “조국에 대한 감정이 없으면 충성도 불가능하다. 출국하기 전에 중국 고전과 역사 서적을 충분히 읽고 가라. 조국의 역사를 정독하며 인생관을 확립해라. 그런 바탕 없이 자연과학을 하면 국가에 해가 된다.”


1935년 8월 천쉐썬은 MIT에 입학해 미국인과 경쟁했다. 1년 만에 항공공정 석사학위를 받았다. 문제는 실습이었다. 미국의 비행기 제조창은 외국인 출입을 금지시켰다. 실습이 불가능한 첸쉐썬은 진로를 놓고 방황했다.


장제스와 화해한 장바이리가 군사위원회 최고고문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장바이리를 만난 첸쉐썬은 사정을 털어놨다. 장바이리는 무슨 일이건 대책이 있는 사람이었다. “비행기 만드는 건 배울 필요 없다. 유럽과 미국의 군사시설을 둘러보니 앞으로는 육군보다 공군이다. 나도 귀국하면 공군 창설을 건의할 생각이다. 소수 정예를 배양하는 칼텍(California Institute of Technology)으로 가라.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과학자가 그곳에 있다.”


공기역학(空氣力學)의 권위자이며 미국 우주과학의 개척자 카먼(Theodore von Karman)은 중국에서 온 젊은 과학자가 맘에 들었다. “1936년 가을, 첸쉐썬이 진일보한 연구를 하고 싶다며 나를 찾아왔다. 우리의 첫 만남이었다. 크지 않은 키에 엄숙하고 단정해 보이는 젊은이였다. 그는 내 질문에 정확한 대답을 했다. 사유가 민첩하고 지혜가 넘쳤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카먼은 첸쉐썬에게 칼텍에 오라고 권유했다. “이곳에 와라. 네가 필요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손 잡으면, 좋은 결과 있으리라 확신한다.” 카먼 55세, 첸쉐썬 25세 때였다.


[“남들이 생각 못 하는 것을 생각하라”]첸쉐썬은 칼텍 공대 박사반에 입학했다. 입학 첫날, 지도교수 카먼이 부인과 함께 저녁을 사줬다. “빼어난 인재가 많은 곳이다. 경쟁하며 한걸음씩 나가라. 작은 걸음으론 창신(創新)이 불가능하다. 긴 보폭으로 빠르고 높게 뛰어야 한다. 남들이 생각 못하는 것을 생각하고, 남들이 말한 적 없는 것을 말해라. 그것이 바로 창신이다.”


카먼은 성격이 급했다. 한번은 첸쉐썬과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견해 차이가 심하자 물건을 집어 던지며 화를 냈다. 첸쉐썬은 말 한마디 없이 자리를 떴다. 이튿날 카먼이 첸쉐썬을 방문했다.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가득했다. “어제는 내가 틀렸다. 네 주장이 맞다.” 이날을 계기로 두 사람은 가까워졌다. 학생에서 시작해 신임하는 제자, 조수를 거쳐 공동 연구자가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카먼은 중국이 어떤 나라인지 궁금했다. 1937년 6월 말, 소련 방문을 마치고 중국을 찾았다. “모스크바에서 기차를 타고 열흘 만에 만주 땅을 밟았다. 만주는 일본의 식민지였다. 칭화대학 총장이 장제스의 청이라며 난징에 가자고 했다. 7월 7일 오후 6시, 난징행 열차를 탔다. 알고 보니 이날이 중일전쟁이 시작된 날이었다. 내가 탄 열차를 끝으로 12년간 베이징발 난징행 열차는 운행이 중단됐다.” 장제스는 중국 자력으로 비행기를 만들고 싶어했다. 카먼에게 방법을 물었다. 명쾌한 대답이 돌아왔다. “첸쉐썬이라는 우수한 청년이 미국에 유학 중이다. 조만간 귀국하면 비행기 제조가 가능하다.”


장제스는 카먼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카먼은 애가 탔다. “그간 나는 유대인이 가장 우수하다고 믿었다. 첸쉐썬을 보며 중국인도 우수하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래도 장제스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미국으로 돌아온 카먼은 첸쉐썬을 불렀다. “미국에 계속 있어라. 중국은 네가 있을 곳이 못 된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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