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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앞 자백」의 증거력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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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으로 세상이 온통 고문규탄과 종식의 여론으로 떠들썩한 시기에 서울고법의 재판부가 매우 중요하고도 주목되는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은 살인죄가 적용돼 사형이 구형됐던 어느 피고인에게『경찰고문에 이은 검사앞의 자백도 유죄의 증거로 삼을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지금까지 검사 앞에서 했던 자백은 거의 대부분 유죄의 증거로 받아들였던 판결 추세와는 다른, 아주 드문 판결이다.
이번 박군사건이 터지자 고문 등 불법수사책임의 일단이 법원에도 있다는 여론이 높았다.
형사사법 제도에 있어 합법적인 수사와 소추 등 수사과정과 절차의 적법성이 생명인데 법원이 불법수사를 별로 따지지 않고 쉽게 유죄판결을 내려주는 경향 때문에 고문이 성행하고 고질화되었다고 지적되기도 했다.
그래서 이번 고문을 두고 「사법적 고문」이란 말도 나왔고 법원부터 각성해야 한다는 여론도 높았다. 사실이지 법관만 눈을 똑바로 뜨고 챙기기만 해도 사정은 훨씬 달라진다.
법관이 피고인을 조용히 불러 경찰에 붙잡혀 검찰에 의해 기소될 때까지의 파경을 자세히 물어보고 인권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기만 해도 수사기관의 태도는 판이하게 개선할 수 있다.
더구나 이번 서울고법처럼 고문에 의한 불법수사의 효과를 송두리째 무력화시키는 적극적 행위인「판결」을 지속적으로 내리면 수사기관은 아예 불법수사를 기도할 염두를 못 낼 것이다.
이처럼 수사기관의 고문행위와 법원의 태도와는 불가분의 밀접한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법과 인권수호의 마지막보루인 법원이 이 같은 당연한 책무를 그 동안 다 해왔는지 묻고싶다.
사법부를 불신하는 법정소란과 재판거부 등은 차치하고서라도 이번 사건에서도 수 차례 지적되었던 법적 근거도 없는 비밀 영장남발 등 자생해야할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마약사범이 체포된 후 증거를 없애려고 마약캡슐을 삼켜버리자 수사관이 기구를 사용해 토하게 한 사실을 고문으로 인정, 위법수사의 의욕을 포기토록 한 미대법원의 태도는 미국법조계만의 교훈일 수는 없다.
위법한 절차로 수집한 증거물을 법원이 유죄의 증거로 삼는 것은 수사기관의 불법을 사법의 이름으로 합법화 시켜주고 불법을 비호·조장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한 「얼·워렌」 미대법원장의 회구 또한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이다.
법관이라고 오늘의 수사환경이나 현실을 전연 도외시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과학수사를 벌일 여건이 제대로 갖추어 있지 않고 수사관의 자질이 낮은데다 격무에 시달리고 있다는 현실쯤은 누구나 알고있다.
그러나 수사현실 때문에 인권이 유린당해도 어쩔 수 없고 불법 수사의 자행이 묵시적으로 인정되어도 좋다는 정당성은 용인될 수 없다. 사법기관이 수사현실을 인정, 관대하게 대할 수록 고문과 불법수사는 더욱 조장되고 과학수사나 수사관자질향상은 진전은 커녕 갈수록 퇴보하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검사 앞의 자백을 가차없이 배척한 서울고법의 판결은 의미있고 가치가 인정되는 판결이다.
사법부는 모름지기 더도 말고 고문을 불법화한 헌법과 형사소송법정신을 「법대로」충실히 따라주기 바란다. 이것이 박군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고 고문을 근절시키는 첩경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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