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회 사건 때 제대로 파헤쳤다면 이렇게 심각한 수준 안 됐을 것"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기사 이미지

김상선 기자

"기온이 급강하한 1일 헌정(憲政) 사상 최초로 전직 대통령에 대한 검찰 소환수사가 이뤄졌다.” <중앙일보 1995년 11월 2일자 1면>

[최순실 국정 농단] 노태우 비자금 수사한 문영호 전 중수2과장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가 노태우 전 대통령을 뇌물수수 혐의로 소환했을 당시 본지 보도 내용이다. 일반 국민들 기억 속에 군사정권의 서슬 퍼런 모습이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던 시절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청사 앞 포토라인에 선 전직 대통령의 모습은 큰 충격을 줬다.

그 후로 21년. 대한민국은 또 한번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를 앞두고 있다. 온 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최순실씨 국정 농단 사건’과 관련해 현직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검찰 조사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중앙SUNDAY는 지난 2일 문영호(65·사법연수원 8기·사진)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를 서울 역삼동 사무실에서 만나 대통령 연루 비리 사건 수사 전반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그는 대검 중수2과장으로 있던 95년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을 직접 수사했다. 문 변호사는 “이런 사건일수록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수사팀은 국민적 요구와 수사의 본질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직 대통령에 대한 조사가 임박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당연히 조사받아야 한다고 본다. 주변 법률가들과 이 문제에 대해 의견을 교환한 결과 10명 중 9명은 대통령도 수사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말하더라. 재임 중 형사상 소추는 할 수 없어도 조사는 할 수 있다고 본다.”

-대통령 관련 비리 수사는 무척 어려울 것 같다.
“검찰로서 엄청난 부담인 것은 사실이다. 노 전 대통령 수사 당시에도 지금과 상황이 비슷했다. 연초에 노 전 대통령 소유 비자금 4000억원에 대한 폭로가 있었는데 검찰이 제대로 수사해 보지 않고 ‘근거가 없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몇 달 뒤 은행계좌 잔고 등 확실한 물증까지 공개되자 민심이 들끓었다. 그때에서야 검찰 수사가 시작됐다.”

-국민 불신이 컸을 텐데.
“수사를 지휘하는 검찰총장과 대검 중수부장, 수사 실무를 담당하는 나까지 ‘수사되는 내용을 100% 공개하자. 이번에는 수사를 제대로 해보자’고 했다. 수사 단계마다 결론 내린 부분을 모두 공개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시간이 지나니 국민들 박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라.”

문 변호사는 노 전 대통령을 소환 조사할 당시 직접 신문을 맡았다. 전직이기는 하지만 한때 최고 권력이었던 이를 소환해 직접 조사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한다.

“노 전 대통령 쪽에서 검찰청사 말고 제3의 장소에서 조사받게 해달라는 요청이 여러 차례 왔었다. 하지만 원칙을 지켜야 했다. 수사팀이 강력하게 고집해 일반 피의자와 똑같이 검찰청사로 출석시켰고 포토라인을 거쳐 청사로 들어오게 했다.”

-외압은 없었나.
“없었다. 다만 수사하면서 달아오른 여론 때문에 어려움을 겪긴 했다. 당시 수사의 본류는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 의혹이었다. 수사 초기 우리는 뇌물로 의심되는 4500억원가량을 찾았고 이 중 2838억원을 뇌물로 특정했다. 하지만 이후 여러 언론을 통해 자금의 사용처에 대한 의혹 제기가 이어졌다. 많은 정치인이 거론됐다. 사용처에 대한 계좌추적을 하느라 많은 시간과 인력을 투입했지만 본질과 벗어난 부분이라는 것이 수사팀의 결론이었다.”

-수사 당시 주의했던 부분은.
“여론에 휘둘리지 않고 중심을 잡으려고 애를 썼다. 노 전 대통령 구속 후 기소를 앞두고 연희동 사저는 왜 압수수색하지 않냐고 언론에서 강하게 문제 제기했다. 수사팀 내부에서도 본래 뇌물죄 수사를 하면 통상 사무실과 함께 가택을 압수수색하는 만큼 이 경우도 예외를 둘 필요가 없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나는 반대했다.

이미 2838억원이라는 뇌물을 받은 혐의가 대부분 입증돼 기소를 앞둔 마당에 가택 압수수색을 하는 건 쓸데없이 논란만 일으키는 일이라고 생각해서다. 가택을 뒤져서 패물, 다이아 반지, 진주 목걸이 이런 게 더 나와봐야 당시 범죄 사실의 큰 흐름에 아무런 영향이 없다고 봤다.”

-특혜를 줘서는 안 된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도 금도를 지켜야 한다. 수사를 원칙적으로 하되 지킬 건 지켜야 되지 않나. 여론에 휩쓸려 수사가 망신 주기가 돼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로 검찰이 지금까지도 비판받는 것은 중간 중간 국민들 눈엔 일방적인 망신 주기로 비춰질 행동을 한 게 있다. 그래선 안 된다.”

-여론의 압력에 맞서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검찰이 원칙과 기본을 지키고 당당하면 버틸 수 있다. 다른 눈치를 보고 외압에 휘둘리고 외부 주문을 받아서 수사하게 되면 버티지 못한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못할 건 못한다고 해야 한다. 검사가 할 일은 범죄 사실을 밝혀내는 것이다. 사건이 정쟁의 대상으로 변질되는 건 경계해야 한다. 대통령에 대한 예우는 하면서 범죄 사실을 밝혀내면 되지 않나.”

‘최순실씨 국정 농단 사건’에 대한 이번 수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검찰은 여러 차례 언론의 질타를 받았다. 애당초 ‘늑장 수사’ 논란에 휩싸였던 것은 물론 최씨가 귀국한 직후 바로 신병을 확보하지 않은 부분도 미심쩍어하는 사람이 많다. 문 변호사는 “검찰 내부적으로 말 못할 사정이 있겠지만 지금까지 있었던 일련의 검찰 대응들이 정도는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검찰의 실수가 많았다.
“2년 전 정윤회 사건 때 제대로 파헤치지 못하고 봉합한 점이 가장 아쉽다. 당시 모든 걸 밝혀 냈다면 국정 농단이 지금처럼 심각한 수준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검찰이 수사를 제대로 해야 나라가 바로 선다.”

-신뢰를 회복하려면.
“앞으로가 중요하다. 국민이 최대한 납득할 만큼 확인해야 한다. 기소 대상에 들어갈 혐의에 대한 수사도 하지만 기소 대상에 포함되지 않을 혐의도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수사해야 한다. 입증이 안 된 건 입증이 안 된다고 솔직히 말하는 게 좋다. 국민들이 용납하고 믿어주는 게 수사의 성공 여부를 가른다. 일반 국민들은 의심이 드는데 왜 기소를 안 하느냐는 비난을 많이 한다. 거기에 대해 답해줘야 한다.”

-후배들에게 조언할 점이 있다면.
“검찰 수사팀이 적절한 방식으로 잘 해나갈 것으로 믿는다. 이번에 수사 제대로 해서 그간 잃었던 국민의 신뢰를 조금이나마 회복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박민제 기자 letmein@joongang.co.kr

오피니언리더의 일요신문 중앙SUNDAY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