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소의 저주’ 절반 풀었다, 광란의 시카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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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컵스가 2만5955일 만에 월드시리즈 홈경기에서 승리했다. 컵스는 5차전에서 클리블랜드를 3-2로 물리치고 2승3패를 기록했다. 리글리필드 구장 밖 전광판에는 ‘컵스 승리’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졌다. 샴페인을 터뜨리며 환호하는 컵스팬들. [시카고 AP=뉴시스]

2만5955일.

1945년 10월 염소와 쫓겨난 컵스팬
“다시는 홈에서 WS 안 열릴 것” 독설
컵스, 클리블랜드와 홈 5차전 이겨
거리 나온 팬들 71년 만에 승리 환호
2승3패 뒤집고 108년 만에 우승 꿈

미국 메이저리그 시카고 컵스가 홈구장에서 월드시리즈(WS·7전4승제) 승리를 거두기까지 걸린 기간이다. 햇수로는 71년이 넘었다.

컵스는 31일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의 리글리필드에서 열린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의 2016년 WS 5차전에서 3-2로 역전승을 거뒀다. 1승3패에 몰렸던 컵스는 이날 승리로 역전 우승의 희망을 살렸다. 컵스 팬들은 거리로 뛰쳐 나와 승리를 자축했다.

2회 1점을 내준 컵스는 4회 크리스 브라이언트의 동점 홈런과 에디슨 러셀의 내야안타, 데이비드 로스의 희생플라이로 3-1 역전에 성공했다. 클리블랜드가 6회 프란시스코 린도어의 적시타로 추격하자 컵스는 7회 1사 2루에서 일찌감치 마무리 투수 아롤디스 채프먼(28·쿠바)을 마운드에 올렸다.

‘쿠바산 미사일’ 채프먼은 시속 160㎞가 넘는 빠른 강속구를 앞세워 시카고의 승리를 지켰다. 2와3분의2이닝을 무실점으로 막는 동안 채프먼은 올 시즌 최다인 42개의 공을 던졌다. 9회 마지막 타자 호세 라미레스를 삼진으로 잡을 때 던진 공 스피드는 무려 시속 163㎞나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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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월드시리즈 4차전에 염소 머피를 데리고 리글리필드에서 입장하려는 빌리 시아니스. [중앙포토]

컵스는 지난 1945년 10월9일 리글리필드에서 열린 WS 6차전에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를 12회 연장 끝에 8-7로 물리쳤다. 20세기 들어 컵스가 리글리필드에서 거둔 WS 마지막 승리였다. 컵스는 그러나 7차전에서 패한 뒤 71년 동안 WS에 진출하지 못했다.

컵스를 지독하게 괴롭힌 ‘염소의 저주’도 이 때 시작됐다. 컵스가 WS에서 마지막으로 우승한 건 1908년이다. 하지만 컵스팬들은 WS에서 우승하지 못하는 이유를 45년 시작된 이 저주에서 찾고 있다. 컵스팬인 빌리 시아니스는 자신이 키우는 염소 머피와 함께 45년 WS 4차전이 열린 리글리필드를 방문했다. 당시 컵스는 시리즈 전적 2승1패로 디트로이트에 앞선 상태였다. 경기를 관전하던 빌리는 ‘염소에게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리글리필드에서 쫓겨났다. 화가 난 빌리가 독설을 퍼부었고, 그게 해마다 저주처럼 컵스를 따라다녔다.

당시 빌리가 어떤 말을 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빌리가 “더 이상 이곳(리글리필드)에서 WS가 열리지 못할 것”이라고 외쳤다는 게 정설이다. 그렇다면 컵스는 이미 저주를 깨뜨린 셈이다. 71년 만에 WS에 올랐고, 리글리필드에서 2패 후 마침내 값진 1승을 거뒀다.

빌리는 45년 4차전 도중 경기장에서 쫓겨난 뒤 당시 컵스 구단주 필립 K 리글리에게 전보를 보냈다. ‘컵스는 이번 WS에서 질 것이다. 당신이 나의 염소에게 모욕을 줬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절대 WS에서 우승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내용이다. 그러나 컵스의 부진이 이어지자 빌리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는 69년 리글리 구단주에게 편지를 보내 “저주는 끝났다(the hex was gone)”고 했다. 빌리는 이듬해 숨졌다.

‘염소의 저주’는 이미 끝났지만 이번엔 ‘스티브 바트만의 저주’가 컵스를 뒤덮고 있다는 말도 있다. 지난 2003년 컵스는 플로리다 말린스(현 마이애미)와의 내셔널리그 챔피언십시리즈에서 3승2패로 앞섰다. 1승만 더하면 WS에 진출할 수 있었던 컵스는 6차전에서도 3-0으로 리드하고 있었다. 그런데 8회 말린스 루이스 카스티요의 타구가 3루 측 파울 지역을 향했다. 좌익수 모이세스 알루가 따라가 몸을 날리며 글러브를 내밀었지만 관중석에 있던 컵스팬 스티브 바트만이 먼저 공을 가로챘다. 아웃이 아닌 파울이 선언됐고, 그 이후 거짓말처럼 경기가 3-8로 뒤집혔다. 컵스는 7차전마저 패해 WS 진출에 실패했다.

미국 프로스포츠 사상 가장 오랫동안 우승하지 못한 컵스는 저주를 애써 부정하고 있다. 과거 컵스 구단은 여러 차례 시아니스 가문에 요청해 리글리필드에 염소를 데려왔다. 그러나 올해는 시아니스 가문과 연락을 끊고, 어떤 이벤트도 열지 않았다. 저주를 깨기 위해 바트만을 시구자로 내세워야 한다는 요구도 묵살했다. 미신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의지다. WS 6차전은 2일 클리블랜드 홈구장 프로그레시브 필드에서 열린다. 컵스는 제이크 아리에타를, 클리블랜드는 조시 톰린을 선발투수로 예고했다.

김원 기자 kim.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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