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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폭포수를 기대하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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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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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현
서울대 교수·철학과

경영학의 마케팅에 폭포효과라는 말이 있다. 폭포수의 흐름에 빗댄 말로, 사회의 상위계층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마케팅에 성공하면 그 효과가 전체 소비자들에게 확산되는 현상을 일컫는다. 우리 사회의 폭포는 어떻게 흐르고 있을까? 얼마 전 법조계 인사들의 비리가 하루를 멀다 하고 신문을 메우고 방송을 시끄럽게 했다. 탈세와 정보 장난으로 주머니를 부풀린 부자들은 머리 몇 번 조아리고 회초리 몇 대 맞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 제자리로 돌아온다. 정치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분쟁으로 시작해 정쟁으로 끝난 지난 국정감사에서 보듯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상대방 흠집내기에 몰두하는 그림은 이제 일상이 되고 있다.

대한민국호는 선장실의 혼란이 극심해 국민이 동요
조타실의 사법부와 정치인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

우리 사회의 폭포는 사방에서 구정물을 흘려 보내고 있다. 이것도 부족한지 이제 상수원에서까지 악취가 풍겨 온다. 막장드라마로 만들어도 현실성이 없어 시청률을 얻지 못할 것 같은 이야기들이 최고 권력의 주변에서 벌어졌다고 전해진다. 국민들은 수치심·분노·허탈감이 결합된 마음을 어찌 정리할지 모른 채 TV 앞에서 넋을 잃는다. 어느 저녁 한 친구가 정치 이렇게 해도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것이 놀랍다고 이야기한다. “대단한 국민의 저력이 오히려 입증된 거 아니냐” 하는 몹쓸 엉뚱한 위안감이 애처롭게 고개를 들려 한다.

과거에도 임기 말이면 최고 권력을 이용해 사익을 추구하는 주변 세력 때문에 국가가 혼란에 빠진 일이 빈번히 있었다. 현재의 혼란을 극복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권력구조로 이행해 국가가 좀 더 발전해 나갈 수 있는 기반을 순탄하게 마련할 수 있을까? 이번에도 과거처럼 임기 말의 혼란상을 뚫고 우리나라가 계속 발전할 수 있을까?

오늘은 과거와 같지 않다. 선진국과의 격차가 워낙 큰 과거에는 열심히 일하는 국민과 그들의 교육열이 발전의 동력이 되어 나라를 이끌어 왔다. 배의 엔진이 강하게 돌아가고 주변에 국가의 발전을 경계하는 암초도 별로 없어 선장이 헛손질을 해도 배는 비틀거릴지언정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호는 동력이 급격히 약화되어 있다. 고령화 사회로 치닫고 있으며, 대학의 수재들은 꿈을 잃고 안분자족의 길을 찾아 한직 시험에 몰린다. 주변에는 암초가 널려 있다. 국가경제를 이끌어 왔던 주력 기업들이 위기에 몰려 경제 전체가 백척간두에 서 있어 새로운 돌파구가 절실하고, 핵 문제 등을 포함해 주변 정세가 심상치 않다. 선원들의 힘을 북돋우면서 동시에 암초를 피해 방향을 바로잡아야 하는 선장의 역할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다.

지금 선장실의 혼란이 극심해 국민들이 동요하고 있다. 하루속히 혼란을 정리하고 순항하기 위해서는 조타실을 구성하는 사법부와 정치인들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정의와 공명정대를 명분으로 하는 사법부는 사태의 본말을 정확히 밝혀 더 이상 불신과 분열이 확대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권력의 시녀라는 부끄러운 이미지를 벗고 정의로운 사회의 중심으로 복귀하는 환골탈태의 기회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또다시 힘이 어디로 향하는가를 살피고 줄서기를 해 비루한 기득권의 나락으로 영영 빠질 것인가는 지금부터 사법부가 어떻게 하는가에 달려 있다.

정치인에게도 이번 상황은 중요한 전환점이다. 과거의 모습대로라면 이번 일로 입지가 좁아진 정치인들은 잔꾀를 부려 사실을 호도하거나 기피할 것이고, 기회라고 생각한 정치인들은 사실 파악보다 정치적 공세에 열을 올려 다음 대선을 위한 지렛대로 사용하려 할 것이다. 이런 행태는 상황을 정치적 이전투구로 변질시켜 잘못을 저지른 이들에게 싸움의 명분을 주고, 국가적 혼란 상황을 지체시킬 것이다. 이번 일을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기회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이전투구의 구태 이미지를 더 굳건히 할 것인가는 지금부터 정치인들이 하는 행동에 달려 있다.

국민의 분노는 청와대와 국정을 농단한 세력들을 향하고 있지만, 국민의 시선은 문제의 해결을 책임지고 있는 사법부와 정치인들을 향하고 있다. 현 상황을 우리 사회의 폭포가 맑은 물을 내려보낼 수 있는 계기로 삼지 못한다면 국민의 분노는 더욱 확대될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김기현 서울대 교수·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