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대기업이 ‘최순실 공범’의 누명을 벗으려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9면

이동현
이동현 기자 중앙일보 기자
기사 이미지

이동현
산업부 기자

미르·K스포츠재단 의혹이 불거진 지난 9월 말 A대기업 기획실 임원을 만났다.

그는 “역대 정권도 이른바 ‘국책사업’을 하겠다며 손을 내민 적이 많았다. 때론 알려지기도 하고, 때론 드러나지 않았지만 기업 하는 입장에선 이런 요구가 특별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법조 출입 시절 알게 된 B대기업의 전직 임원 C씨를 만난 건 의혹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하던 이달 중순이었다. 그는 지난 정권에서 ‘4대강 사업’ 담합 의혹에 연루돼 불구속 기소됐다가 회사를 떠났다.

“정권마다 대기업의 협조를 요구하는 일은 많았습니다. 거부하기 어려운 요청이죠. 전경련 같은 경제단체가 앞장서니 부담도 적어요. 무엇보다 ‘성의를 표시하면 나쁠 게 없다’는 학습효과가 있는 게 사실입니다.”

담합에 참여했던 대기업 건설사들은 재판에 넘겨졌고, 지난해 말 대법원에서 벌금형이 확정됐다. 기소됐던 임원들도 대부분 집행유예에 그쳤다. 1453억원의 과징금이 부과되고 입찰제한 조치를 받았지만 지난해 광복절 특사로 면죄부를 받았다.

기사 이미지

[일러스트=박용석 기자]

C씨는 “문제가 된 국책사업에 참여하면 기업 입장에서 피곤해지는 게 사실이지만 결과적으로 손해를 보지 않는다. 4대강 사업 담합에 참여한 기업들이 얼마나 많은 수익을 올렸는지 한번 보라”고 말했다.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 이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상에선 “대기업들도 비리의 공범”이란 주장이 나온다. 대기업 입장에선 적은 돈으로 보험을 든 게 아니냔 비판이다. 롯데그룹이 검찰 수사를 앞두고 K스포츠재단에 70억원을 냈다가 돌려받은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 같은 주장은 더 확산되는 추세다.

대기업들은 당혹해한다. 각종 사업의 인허가권을 쥐고 있는 정부의 입김이 불어오면 기업 입장에서 거부할 수 있겠느냐는 변명이다.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상황에서 ‘반기업 정서’가 커질까 우려하기도 한다.

한국 경제를 이끌어 가는 대기업들의 성장엔진은 이미 꺼져 가고 있다. 매출액 기준 30대 기업의 올 3분기(7~9월)까지 누계실적을 집계해 보니 15곳의 매출액이 지난해보다 줄었다. 영업이익이 줄어든 기업도 13곳이나 됐다. 대기업의 성장엔진이 꺼지면 납품하는 중소기업도,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가계도 망가질 수밖에 없다.

C씨가 말한 ‘학습효과’란 결국 우리 정치권과 기업들이 극복해야 할 적폐다. 정치권의 요구를 들어주면 결과적으로 나쁠 게 없다는 기대감이 있는 한 정상 사회가 되기 어렵다. 기업이 피해자인지, 공범인지 따지는 일은 사실상 무의미하다. 정치권에 눈 돌릴 필요 없이 기업활동에만 몰두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자리 잡는다면 말이다.

이동현 산업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