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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으로] 시판 도시락 밥맛 경쟁…몸값 뛰는 ‘밥 소믈리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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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밥 감별사의 세계

지난 26일 오후 2시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삼성웰스토리 식품연구소 3층. 쌀 품질 관리 및 연구개발을 담당하는 ‘밥 소믈리에’ 최서윤 선임이 연구실에서 쌀의 신선도를 측정 중이었다. 쌀 2g이 담긴 10mL짜리 시험관에 녹색 시약을 붓고 흔드니 시험관 속 시약이 금세 청록색으로 변했다. 최 선임은 “푸른색이 짙어질수록 신선한 쌀”이라고 설명했다. 쌀은 공기 중의 산소와 결합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산성 성질을 더욱 잘 띠게 되는데 묵은 쌀은 시약을 노랗게 바꾼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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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6일 오후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삼성웰스토리 구내식당에서 이 회사 식품연구소 최서윤 선임이 갓 지은 밥의 향을 맡아보고 있다. [사진 장진영 기자]

45㎡가량의 밥 소믈리에 연구실에는 밥알의 식감, 외형 등을 측정하는 다양한 실험기기와 휴대용 정미기 등이 눈에 띄었다. 아밀로오스(amylose·녹말의 한 성분) 함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밥의 찰기가 달라지는데 최적의 찰기를 찾는 것도 이 연구실에서 이뤄진다. 쌀 속에 단백질이 얼마나 포함돼 있는지도 따진다. 단백질 함량이 높을수록 벼 생육 과정에 질소비료를 사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백질 함량 6% 이하를 고품질 쌀로 여긴다. 3~4인분용 소형 전기밥솥도 여러 대 갖췄다. 한 전기밥솥에서 구수한 밥 향이 은은하게 새어 나왔다.

밥의 맛·향 평가해 산지·품종 식별
쌀 씻는 방법, 취사 온도까지 관리

일본취반협회서 국제자격증 수여
국내 40~50명 식품업체서 활동
“도시락 시장 급성장해 인기 높아”

1인 가구, 혼밥족(혼자 밥 먹는 사람들) 현상에 하루에 밥 두 공기도 채 먹지 않는 쌀 소비 하락시대지만 식품·외식업체들은 ‘밥맛’ 경쟁 중이다. 자연스레 밥 소믈리에라는 직업이 관심을 끌고 있다. 프랑스어 소믈리에(sommelier)는 흔히 와인 감별사로 널리 쓰이는데 어원은 중세 유럽에서 식품 보관을 담당하던 직책인 ‘솜(somme)’이다. 이에 음식명 다음에 자연스레 소믈리에가 붙는다. 밥 소믈리에는 단순히 맛과 향의 관능 평가를 통해 쌀 산지·품종을 식별해내는 것을 넘어 ‘쌀→밥’이 되는 전 과정에 필요한 지식 및 기술, 영양학적 가치 등을 갖춘 전문가를 말한다.

밥 소믈리에 자격은 사단법인 일본취반(炊飯·쌀로 밥을 짓는 조리 과정)협회가 수여하는 일종의 국제 자격증이다. 외국인들이 응시할 정도로 권위가 있다. 일본은 밥 가공 기술이 잘 발달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 밥 소믈리에(ごはんソムリエ) 자격시험은 2006년 도입됐다. 실기시험의 경우 고시히카리 등 다양한 품종으로 지은 각 밥의 향과 맛·모양·찰기 등을 구분·평가할 줄 알아야 하는데 20명으로 구성된 전문 패널의 테스트 결과와 상당 부분 일치해야 한다. 국내 1호 밥 소믈리에는 삼성웰스토리 식품연구소 김정순(소장) 그룹장이다.

국내 편의점 도시락 시장은 한 해 5000억원 규모로 급성장했다. 그만큼 밥맛 경쟁이 치열해진 것으로 소믈리에 몸값도 높아지고 있다. 편의점 도시락은 냉장 상태로 유통된다. 식다 못해 차가운 밥이다. 이 찬밥을 전자레인지 등에 데웠을 때에도 밥맛을 좋게 유지하는 게 핵심이다.

밥 소믈리에인 BGF푸드(편의점 CU) 박정운 부장은 “냉장 상태로 소비자에게 전해지는 도시락에 적합한 쌀 품종을 찾는 일부터 쌀 고유 수분 15~16% 유지 관리, 씻는 방법, 취사 온도 및 시간 등을 분석,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다”며 “좋은 밥맛을 유지하는 일이 동종 업계의 과제로 떠오르다 보니 밥 소믈리에의 인기도 높아지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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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세븐일레븐 소속 밥 소믈리에 역시 도시락의 원재료 준비, 식단 구성, 위생 등의 과정에 참여하고 있다. GS리테일(편의점 GS25)도 비슷하다. 밥 소믈리에들이 갓 지은 밥맛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GS리테일 조한승 과장은 “밥맛의 첫째 조건은 좋은 양곡”이라며 “깨진 쌀은 식감이 좋지 않아 온전한 쌀(완전립)의 비율 관리에 신경 쓰는데 이를 위해 공장마다 밥 소믈리에들이 활동 중”이라고 말했다.

일본 취반협회 자격을 취득한 국내 밥 소믈리에는 40~50여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국내에서는 2012년부터 (사)세계음식문화연구원에 2개월 과정의 밥 소믈리에 강좌가 개설됐다. 배출 인원은 120여 명이다. 국내외에서 밥 소믈리에 자격을 취득했거나 과정을 수료한 이들은 식품·외식 분야 등에서 활동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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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한국인의 힘은 ‘밥심(힘의 사투리)’에서 나온다고 하는데 쌀 소비량은 계속 감소 추세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국민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62.9㎏이다. 하루 172.3g을 먹는 건데 밥 한 공기에 필요한 쌀의 양을 100g으로 산정했을 때 하루 두 공기도 먹지 않는 것이다. 조사 결과가 처음 공개된 1963년의 289g과 비교하면 상당한 차이다. 17세 미만 아동의 아침 식사 결식률은 낮아졌지만 여전히 경제적 이유로 밥을 먹지 못하는 아동도 있다. 전문가들은 쌀 소비량 감소는 식량주권을 해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대한영양사협회는 생활 속 보약 밥의 중요성을 알리고 있다. 대한영양사협회 임경숙(수원대 식품영양학과 교수) 회장은 “밥은 여러 반찬과 함께 먹는데 영양소가 골고루 섭취되는 것”이라며 “밥은 알레르기를 일으키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밥 소믈리에 자격시험은=일본 취반협회는 아직 내년도 시험 일정을 공지하지 않은 상태다. 보통 11월 응시 접수, 다음 해 3월 필기·실기시험이 진행된다. 수험료는 교재비 포함 5만1420엔(약 56만원), 합격자는 추가로 인증 등록비 1만280엔(약 11만2000원)을 내야 한다.

[S BOX] 처음 쌀 씻는 물 바로 버려야 밥에 잡내 없어

맛있는 밥 짓기는 좋은 쌀 고르기에서 시작된다. 조선시대 농서인 『행포지(杏蒲志)』(1825)에 경기도 이천 쌀이 좋다는 내용이 있고, 브랜드 쌀이 많이 있지만 밥 소믈리에들은 무엇보다 자신의 입맛에 맞는 쌀을 고르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도정한 지 하루나 이틀밖에 지나지 않은 햅쌀 중 완전립 비율 90% 이상의 쌀은 일단 합격점이다. 완전립은 쌀알이 금이 가거나 깨지지 않은 비율인데 100%에 가까울수록 식감이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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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관도 중요하다. 최대한 공기 중 산소와의 접촉을 피해야 한다. 쌀 표면이 산성화돼 향과 맛을 떨어뜨린다. 비닐주머니 등에 한 번에 취사할 양만 따로 담아두는 것도 좋다 . 쌀 씻기에도 비법이 있다. 처음 씻은 물은 바로 버려야 한다. 그래야 밥에 잡내가 배지 않는다. 이후 쌀알에 금이 가지 않도록 두세 번 부드럽게 씻는다. 보통 30분 이상 불리면 쌀알이 물을 흡수한다. 밥 소믈리에인 삼성웰스토리 최서윤(사진) 선임은 “아침에 불릴 시간이 없다면 저녁때 미리 불렸다 채반으로 물을 뺀 후 보관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전기밥솥이 취사 완료를 알리면 주걱으로 밥을 열십자(十)로 가른 뒤 각각 저으며 김을 빼준다.

용인=김민욱 기자 kim.minwook@joongang.co.kr
사진=장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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