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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틀 회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김용녀<경북 문경군 호계면 막곡2리 193의 1>
꼭 35년 동안의 객지생활을 청산하고 물바가지 두개와 현미 한말을 가지고 떠났던 고향 땅 시댁으로 되돌아왔다.
큰아들 내외가 할아버지를 모시고 시내로 이사간 빈집을 우리 내외가 인계받은 것이다.
첫눈에 알아볼수 있는 반백머리가 된 옛 친구와 동네 옹달샘, 그리고 살구나무·감나무들이 두손 벌려 껴안듯 반겨준다.
그 동안 큰며느리가 시할머니의 벼락같은 질타를 감수하면서 시골의 현대화에 진력하다가 5년전 갑자기 시할머니가 타계하신 뒤 물려받은 집안 살림.
오늘도 아침부터 영감따라 몇해전부터 임자도 없이 버려졌던 외양간안을 정리하는데 안쪽 벽 구석에서 뜻밖에도 그 옛날 내가 시어머니와 함께 사용했던 베틀을 발견했다.
선다리, 누운다리, 뒷다리등 베틀의 주요 부분은 없었으나 희한하게도 도루마리가 비거미, 잉앗대, 깨어진 북을 앉을깨의 도움을 받아 가슴에 품고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을 때 가지가지 베틀에 얽힌 옛일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어제 옛날에 베틀이 놓여 있던 부엌방을 새로 도배하면서 깡보리죽도 얻어먹기 어려웠던 지난날의 보릿고개를 회상하고 혼자 고소했다.
그런데 오늘은 내가 20대초반 시어머님의 손발이 되어 베틀과 동고동락하던 시절을 회상케 하는 이것들을 만나게 되었으니 얼마나 반가운지 한때 일손을 놓고 옛일을 생각했다.
시어머님의 손끝을 속여 무명 한필 몰래 내다 팔아 국민학교 교사가 된 영감의 여비로 충당하려다가 발각됐으나 채용 통지서가 나의 친정 행을 막아준 일, 삼복 더위에 졸면서 삼베를 짜다가 둘째아들 엉덩이와 호롱불을 뽀뽀시킨 일…깨어진 북을 만지면서 옛 생각에 젖어 있는데, 『무엇하는거요, 어서 빨리 치워야지. 큰집에서 저녁 먹지 말고 건너오라던데.』
외양간 안을 정리하던 영감도 나름대로 옛 추억을 즐겼으련만 밖으로 나타내지 않는것은 이순이 된 나이탓일까?
그러나 저러나 내일은 베틀을 좀더 깨끗하게 손질하여 보관했다가 손자들에게 우리집의 뿌리를 이야기 해줄때 보여주기로 마음먹었다.
다음 추석에는 시어머님 산소에 찾아가서 베틀 소식도 알려드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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