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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알베르토의 문화탐구생활] 시(詩)를 잊은 삶, 자유를 잃은 삶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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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정지용(1902~1950) 시인의 고향 충북 옥천에 다녀왔다. 한글날 홍보 영상을 촬영하기 위해서였다. 그 자리에는 김경주 시인이 동행했다. 그는 나를 비롯한 외국인 세 명과 함께, 하루 종일 시(詩)와 한글의 매력에 대해 이야기 나눴다. 오후에는 춘추민속관 정원의 나무 아래 앉아 한글로 시를 썼다. 실로 오랜만에, ‘시의 힘’에 흠뻑 빠질 수 있었다.

나도 한때 시인으로 불렸다. 특출한 재능은 아니었지만, 중학교 때부터 시를 읽고 쓰며 문학과 사랑에 빠졌다. 2010년 어느 시 공모전에 입상해 작은 출판사로부터 연락을 받기도 했다. 이탈리아의 젊은 시인들을 소개하는 시집에 내 시를 싣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당시에도 한국에 살았던 나는 그동안 써 둔 스무 편의 시를 보냈고, 그 시집이 발간되면서 시인으로 등단하게 됐다.

그 시절 나에게 시는 복잡한 세상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 도피처였다. 시를 통해 일상생활의 스트레스도 풀고, 생각과 감정을 정리해 빠르게 흘러가는 순간도 잡아 두었다. 그때는 ‘평생 시 없이 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시와 함께할 시간이 서서히 줄어들었다. 얼마 후에는 시를 향한 의지조차 사라졌다. 여유 시간이 생겨도 스마트폰으로 축구 뉴스나 들여다보기 일쑤였다. 항상 무언가로부터 쫓기듯 살았기에, 잠깐의 틈이라도 생기면 그저 잠잘 궁리만 했다. 그렇게 6년이 흘렀다.

옥천의 옛 한옥에서 김경주 시인과 시심(詩心)을 나누며, 문득 시 없이 살아온 지난 6년의 삶을 되돌아보게 됐다. 굵직한 일들은 떠올랐지만, 사소한 감정이나 감동적인 순간은 별로 생각나는 게 없었다. 오히려 그보다 오래된 9년 전 기억이 더 생생했다.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그때, 나는 일기 대신 시를 썼다. 지금도 그 시들을 읽으면 당시 내 마음의 깊은 곳까지 꺼내어 볼 수 있다. 그랬던 내가 왜 시 쓰기를 그만뒀을까. 김경주 시인이 들려준 이야기에서 답을 찾았다.

첫째, 시를 쓸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 시간을 잘 ‘관리’한다고 착각한다. 실제로는 제한된 시간에 정해진 일정을 조정하며 ‘소비’할 뿐인데 말이다. 자신의 인생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충분한 시간을 할애할 만큼 여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 시는 시간적 여유 속에 피어나는 법이다. 시간 제약의 압박을 버려야, 초감각적 언어의 세상에 몰입해 내면을 시로 표현할 수 있다. 시를 읽는 것도 마찬가지다. 똑같은 시를 여러 번 소리 내어 읽으며 찬찬히 운율을 느껴야, 비로소 그 시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둘째, 과정의 효율성과 개인의 이익을 중시하는 생활 습관 때문이다. 사람들은 매사를 빨리빨리 해치우고 싶어하며, 예상보다 오래 걸리면 짜증 내고 불안해 한다. 또 자신에게 당장 이익이 되는 일만 맡으려 한다. 이러한 습관은 시에 대한 인내심을 잃게 만든다. 시적 영감이 떠오를 때까지 차분히 기다릴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시를 읽고 쓰는 행위는 결코 ‘효율적인’ 일이 아니거니와, 어떤 목적이나 반사 이익도 없다. 시의 의미는 오직 시 그 자체에 있다.

오랜만에 시와 함께한 하루는, 그간 잊고 지낸 언어 유희의 즐거움과 생각의 자유를 만끽하게 해 줬다. 나와 백지만 존재하는 시공간에서 ‘자신과의 대화’도 나눌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시의 힘을 느꼈고, ‘현대 사회에도 아직 시의 역할이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뜻 보면 쓸데없이 느껴지지만, 오히려 바쁠수록 이런 시간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이 “시는 어렵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런 편견은 학창 시절에 시를 억지로 공부했던 기억 때문일 것이다. 시를 쓰는 것은, 백지 위에서 완벽히 자유를 누리는 귀중한 기회다. 다른 문학 장르와 달리, 시에서는 어떤 표현이나 스타일도 허용되기에 자기만의 방식을 추구할 수 있다. 시를 읽을 때도 한 구절 한 구절 천천히 낭독하면 그 의미가 피부로 와 닿는다. 이렇듯 시는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

요즘은 그 어느 때보다 언어가 중요한 시대다. 사람들은 매일 SNS에 글을 작성해 다른 이들과 공유한다. 이런 시대에 시가 읽히지 않고 쓰이지 않으니 안타깝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시를 통해 평범한 일상을 귀중한 추억의 기록으로 남기길 바란다.

글 알베르토 몬디.
맥주와 자동차에 이어 이제는 이탈리아 문화까지 영업하는 JTBC '비정상회담' 마성의 알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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