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미남 정우성을 이긴, '참바다'씨 유해진의 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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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럭키`의 한 장면

유해진 주연의 코미디 영화 '럭키'(이계벽 감독)가 개봉 9일 만에 3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역대 코미디 영화 최단 기록이다. 21일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럭키'는 이날 오후 누적 관객 300만명을 넘어섰다(300만1086명).

'럭키'는 '7번방의 선물'(2013, 이환경 감독, 1281만명)이 가진 코미디 영화 최단기간 300만 돌파 기록을 하루 앞당겼다. 올해 300만명 이상의 관객을 모은 국내 개봉영화 중 코미디는 '럭키'가 유일하다.

'럭키'의 흥행은 제목처럼 '운'이 작용한 결과일까.

추석 이후 극장가를 지배할 것 같았던 '아수라'(김성수 감독, 20일 현재 258만명)가 기대보다 부진했던 덕도 있지만, '럭키'는 온전히 잘 짜여진 연출과 연기의 힘으로 흥행을 일궈냈다.

흥행 면에서만 보면, 유해진('럭키')의 인간미 넘치는 얼굴이 조각미남 같은 정우성('아수라')의 얼굴을 이겼다고 할 수 있다.

영화는 일본영화 '열쇠 도둑의 방법'(2012, 우치다 켄지 감독)을 리메이크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잔혹한 킬러가 목욕탕에서 비누를 밟고 바닥에 쓰러져 기억상실증에 걸리면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는 이야기다.

유해진이 킬러 형욱을, 형욱과 삶이 바뀌게 되는 무명배우 재성을 이준이 연기했다.

10월 26일로 예정된 마블의 '침공'('닥터 스트레인지' 개봉)에 앞서, 절묘한 타이밍으로 치고 빠지기 전략을 구사한 배급의 힘도 있지만, '럭키'는 영화 자체의 힘만으로도 10월 극장가를 지배할 자격을 충분히 갖췄다.

기존 코미디 영화의 고질적인 공식인 눈물샘 자극하기가 없었고, 재미있고 따뜻한 이야기로 가족 관객을 모을 수 있었다.

뭐니뭐니 해도 '럭키' 흥행의 일등 공신은 유해진의 연기다. 유해진의 코믹 연기는 코미디를 포함한 모든 장르에서 늘 빛을 발했다.

가장 비근한 예가 '해적: 바다로 간 산적'(2014, 이석훈 감독)이었다.

산적들에게 수영을 가르치며 내뱉은 대사 '음~파 음~파'는 유해진의 애드립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이 애드립은 따로 영상 클립이 만들어질 정도로 큰 인기를 모았다.

'럭키'의 연출이 영리했던 건, 유해진의 얼굴에서 익살스러움을 상당 부분 덜어냈다는 점이다.

유해진이 연기한 킬러 형욱은 기억을 잃은 뒤, 음습한 음지에서 서민들의 삶의 공간인 양지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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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혹하고 절제력 있는 킬러와 사람냄새 물씬 나는 무명배우,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존재의 간격과 충돌이 관객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한다.

비밀스러운 세계에서 남부럽지 않은 부유한 삶을 살던 킬러가 하루 아침에 전 재산 2000원의 비루한 배우지망생으로 '전락'하다니~.

유해진은 킬러 형욱의 냉정하고 날이 선 무드를 훼손시키지 않으며, 킬러의 얼굴 이면의 친근함을 이끌어낸다.

말도 안되게 꼬여가며, 점점 뜨거워지는 상황 속에서 유해진은 차가움이 느껴질 정도로 차분함을 유지하지만, 결국 그 차가움을 조금씩 무장해제시켜가며, 코미디의 따뜻한 기운을 불어넣는다.

사실 이 영화에서 유해진이 보여준 친근한 얼굴은 기시감이 있다.

유해진은 예능프로그램 '삼시세끼'에서 푸근하면서 친근하지만, 때로는 담담한 '참바다'씨의 얼굴을 보여준 바 있다.

킬러 형욱이 무명배우 재성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간간이 '참바다'씨의 얼굴이 보이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럭키'가 유해진에게 더욱 각별할 수 밖에 없는 건, 단순히 이 영화가 자신의 첫 주연작이라서가 아니다.

충무로를 대표하는 신스틸러가 되기까지 오랜 기간 무명배우로 살아왔던 자신의 자전적인 경험이 오롯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킬러 형욱이 배우가 되기 위해 준비하는 모습과 액션 단역으로 종횡무진 활약하는 장면 등이 그렇다.

그래서일까. 목숨을 끊으려 하는 재성에게 킬러 형욱이 충고해주는 대사 "하찮은 삶은 없다"는 예전의 자신처럼 힘들고 막막한 무명배우의 길을 걷고 있는 후배들에 대한 격려로 들린다.

정현목 기자 gojh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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