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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타샤는 종일 단칸방서 게임만…57%가 학교 밖 떠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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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7㎡(약 두 평) 남짓한 옹색한 방에 고장 난 선풍기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벽에는 남루한 옷가지들이 난삽하게 걸려 있다. 지난달 30일 러시아 소녀 나타샤(12·가명)가 살고 있는 충남 아산시 신창면의 단칸방의 모습이었다.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나고 자란 나타샤는 6개월 전 아빠를 따라 한국에 온 중도입국 자녀다. 엄마는 러시아인이지만 아빠는 고려인(러시아 동포)이다. 일용직을 전전하고 있는 아빠는 2005년부터 4년 반 동안 홀로 경기도 안산시에 머물며 일한 경험이 있다. 그때 나타샤는 엄마와 둘이 러시아에 있었다. 하지만 아빠와 엄마가 헤어지면서 아빠를 따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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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타샤(가명)가 아빠와 산책하고 있다. 나타샤는 6개월 전부터 충남 아산시에서 산다. 부모의 이혼 뒤 한국계 러시아인인 아빠를 따라 한국에 온 중도입국 자녀다. [사진 오상민 기자]

나타샤의 아빠는 새벽 5시에 일을 나가 오후 6시가 넘어 돌아온다. 오전 8시쯤 나타샤가 일어나면 아빠는 이미 출근하고 없다. 아침은 컵라면을 먹거나 옥수수 등으로 대충 때울 때가 많다. 하루에 세 끼를 다 챙겨 먹는 날은 거의 없다. 이후 태블릿PC로 게임을 하거나, 인터넷을 한다. 가끔 한국 드라마를 볼 때도 있다. 지난해 12월 아빠에게서 생일 선물로 받은 7.9인치 태블릿PC는 세상과 나타샤를 연결하는 유일한 창(窓)이다. 나타샤가 문밖으로 나서는 일은 거의 없다. 한국어를 할 줄 모르는 데다 밖에는 논과 밭뿐이다. 하루 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는 날이 많다. 나타샤는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 부녀(父女)는 어떻게 해야 학교에 갈 수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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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타샤 같은 중도입국 자녀는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태어나 공교육 제도 안에서 성장하는 다문화가정 자녀와는 다르다. 한국어를 거의 못하는 상태에서 부모를 따라오는 경우가 대다수다. 학교를 다니고 직장을 구하는 게 어려울 수밖에 없다. 여성정책연구원 설문조사에 따르면 초·중·고교 학령기에 있는 중도입국 자녀 중 56.6%가 학교에 다니지 않고 있다. 이들은 정서적으로 민감한 시기에 부모와 떨어진 경험이 있어 우울증 등의 정신적 고통을 겪기도 한다. 한국에서 태어나 상대적으로 쉽게 한국 생활에 적응하는 다문화가정 자녀와 달리 중도입국 자녀는 언어·정서·문화의 3중고를 겪는다.

아산 신창면 소녀로 본 문제점
고려인 아빠 새벽 5시면 일 나가
학교 입학시킬 방법조차 몰라
다문화자녀와 달리 지원 못 받아
중국서 고1 마치고 온 21세 장모씨
편의점·미용실·공장 노동 전전

하지만 이들을 위한 정책이나 지원은 거의 없다. 정부가 주로 이주여성과 다문화가정 자녀 등에 정책의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런데 최근 몇 년 새 중도입국 자녀가 크게 늘면서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가 생겼다. 다문화가족지원법, 청소년복지지원법에 중도입국 자녀를 위한 조항은 미흡하다. 현행 다문화가족지원법은 결혼 이민자와 귀화자 등 가족 중 한국 국적을 가진 이들과 그 자녀만 다문화가정으로 보고 혜택을 준다. 나타샤 같은 외국인 근로자의 자녀는 아예 대상에서 빠져 있다. 조삼혁 아산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장은 “중도입국 청소년들에 대한 개념 정리가 법에서도 안 돼 있다. 이들에 대한 맞춤형 정책 마련을 위해 관련 법 정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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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어려움은 언어 문제다. 이들은 한국에 입국한 뒤 집 안에만 있는 경우가 많다. 교육 공백이 언어 사용의 장애로 이어진다. 충남 아산시 신창초등학교의 김한솔 교사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니 아이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수업 시간에 갑자기 나가버리거나 책을 집어던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1년간 학교를 쉬다가 온 아이가 있었는데, 조그만 일이 있어도 정말 큰일이 난 것처럼 크게 울어 당황스러웠다. 고립감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고 덧붙였다.

부모들도 의사소통이 안 돼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김 교사에 따르면 지난달 초 아지즈(9·가명)의 어머니가 신창초등학교로 전화를 걸어 담임교사를 찾았다. 6개월 전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아지즈는 이 학교 2학년생이다. 담임교사가 전화를 건네받자 어머니는 한동안 아무 말도 안 하다 러시아어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대화가 되지 않자 한국말을 조금 할 수 있는 아지즈를 바꿔 줬다. “친구들이 자꾸 내 신발이랑 실내화를 숨겨요. 엄마가 화가 나신대요.”

신창초 김현숙 교감은 “가정통신문 등 공지사항을 전달할 때는 중도입국 자녀 부모들끼리 단체 카톡방을 만들어 담임선생님과 통역이 가능한 인근 주민을 초대한다. 선생님이 공지사항을 올리면 이를 통역 가능한 주민이 번역해 부모들에게 전파하는 식으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외국의 학력 인정이 쉽지 않은 것도 문제다. 중도입국 자녀가 출신국 고교 2학년 학력을 인정받아 한국에서 고등학교 3학년으로 입학하려면 초·중 졸업증명서와 성적증명서 등 각종 서류가 필요하다. 이 서류들은 한국영사관의 번역과 공증을 마쳐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부모가 이 사실을 잘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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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를 찾는 데도 한계가 있다. 서울 대림동의 한 PC방에서 만난 장모(21)씨 역시 3년 전인 18세 때 한국에 온 중도입국 자녀다. 그는 중국에서 고등학교 1학년까지 다녔지만 한국에서는 학교에 가지 못했다. 한국인 어머니와 중국인 아버지는 경기도의 한 공장에서 일한다. 장씨는 편의점·공장·미용실 등에서 일해 왔다. 그는 “다 커서 한국에 온 중국인들은 이민자 2세에 비해 몇 배로 적응이 어렵다”고 말했다.

글=채승기·윤재영 기자 che@joongang.co.kr
사진=오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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