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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배임죄 적용에 신중 … 석유공사· KT· KT&G 잇따라 무죄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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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호 10면

올해 1월 11일 이영렬(58·연수원) 서울중앙지검장이 이례적으로 서울고검 기자실에 와 긴급 브리핑을 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5부(부장 김동아)가 강영원(65) 전 한국석유공사 사장에게 무죄를 선고한 지 사흘 뒤였다. 강 전 사장은 캐나다 석유개발업체 하베스트를 부실 인수해 국고 5500억원을 낭비한 혐의(배임)로 구속기소돼 재판을 받아왔다.


강 전 사장은 지난해 의욕적으로 자원개발 비리 수사에 나섰던 검찰이 처음 기소한 ‘대어’였다. 무죄 선고가 검찰에 준 충격은 그만큼 컸다. 이 지검장은 “나랏돈 5500억원의 손실을 가져왔음에도 무리한 기소라서 형사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법원 판단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후 검찰이 항소했지만 지난 8월 항소심에서도 무죄가 선고됐다.


검찰이 압수수색의 요건과 절차를 엄격히 규제하는 등의 난관을 뚫고 재판에 넘긴 특수수사 사건들이 유죄 인정의 문턱에서 주저앉는 일이 늘고 있다.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는 “기업인의 경영상 판단 결과에 대해 배임죄를 인정하는 데 법원이 인색해진 데다 금품 공여자의 자백에 대한 신빙성 판단을 신중하게 하는 추세와 무관치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검찰의 기업 수사는 배임·횡령 혐의 수사→대규모 압수수색→비자금 확인→기업인 인신 구속→금품 공여 자백 확보→금품수수자 처벌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 중 특수수사의 시작과 끝을 의미했던 두 가지 열쇠가 무력화되고 있는 것이다.


강 전 사장 사건의 1심 재판부는 “경영상 판단의 과정에 과오는 있지만 석유공사가 아닌 강 전 사장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제시했다. 강 전 사장처럼 배임 혐의로 기소됐다가 무죄 또는 집행유예로 풀려난 기업인 사례는 줄을 이었다.


지난해 9월 3개 기업의 주식을 적정가보다 높게 매입해 회사에 103억여원의 손해를 끼친 혐의 등으로 기소된 이석채(71) 전 KT 회장도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법원은 “위험이 내재된 회사 경영 과정에서 예측이 빗나가 손해가 발생한 경우까지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올해 5월 2심은 횡령 부분을 유죄로 보고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지만 배임 혐의가 무죄라는 판단은 그대로였다. 2843억원을 계열사에 부당 지원한 혐의(배임) 등으로 기소됐던 강덕수(66) 전 STX그룹 회장이 지난해 10월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최근 금품수수 범죄에서 법원이 공여자 진술의 신빙성을 문제 삼아 무죄를 선고한 사건은 민영진(58) 전 KT&G 사장이 대표적이다. 민 전 사장은 협력업체와 회사 관계자, 부하 직원 등으로부터 1억7000여만원 상당의 금품을 받은 혐의(배임수재)로 구속까지 됐지만 지난 6월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법원은 “돈을 건넸다고 자백한 이들이 다른 수사 및 재판에서 선처를 받으려 허위 진술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이때도 검찰 고위 관계자는 “금품 공여자가 법정에서 진술을 유지하는 사안까지 무죄를 선고하면 부정부패 수사는 사실상 불가능해진다”고 반발했다. 그러나 지난달 27일 서울고법은 유사한 논리로 고(故)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에게서 불법 정치자금 3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됐던 이완구(66) 전 국무총리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김선미 기자 call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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