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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로 배깅 vs 빨리 빨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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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호 31면

유럽인과 한국인들이 ‘도전’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의 차이를 알려면 등산하는 법을 보면 된다. 지난 추석 연휴에 스코틀랜드에 가서 영국서 가장 높은 벤 네비스산을 올라갔다. 해발 1345m인 이 산의 꼭대기에서 보는 경치는 한라산에 뒤지지 않는다. 나는 스코틀랜드와 한국의 대표적인 두 산의 경치를 모두 좋아한다. 하지만 두 나라 사람들의 등산법에는 확실히 차이가 있다.


한국에서는 튼튼하게 잘 정비된 등산로가 정상을 향해 한쪽 방향으로 잘 뻗어 있다. 신속한 정상 등반에 알맞다. 반면 스코틀랜드에서 우리는 속도 대신 경치감상을 위주로 하는 등산로를 따라 천천히 즐기면서 올라간다. 내가 처음에 한국에 왔을 때 하이킹이 매우 편리한 데 놀랐다. 현대식 지하철은 식당과 고급 용품점으로 가득 찬 등산로 입구까지 데려다 준다. 정상으로 곧장 뻗은 등산로의 계단들은 매우 튼튼하다. 시간을 단축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만족을 줄 수 없을 정도다.


스코틀랜드에선 굽이굽이 도로를 따라 장시간 운전하고 진흙들판을 걸어서 지나야 겨우 외진 산악지역의 등산로 입구에 도달할 수 있다. 등산로는 사람보다는 동물에 어울리게 조성된 것처럼 보인다.


나는 이번 벤 네비스산 등산 때 스코틀랜드의 3000피트(914m) 이상 봉우리 282좌를 완등한 68세의 친척과 함께 갔다. 이 봉우리들은 1891년 처음 리스트에 올린 휴 먼로 경의 이름을 따 ‘먼로’라 불린다. 1901년에서야 282좌를 처음 완등한 사람이 나왔다. ‘먼로 배깅(Munro Bagging)’은 80년대까지만 해도 인기있는 취미가 아니었다. 현재 완등자는 5000여 명이다.


스코틀랜드인은 한국인보다 고급사양의 등산용품을 사용하지 않는다. 한라산 꼭대기에서도 유튜브를 볼 수 있는 한국과 달리 스코틀랜드 산에서는 휴대폰 신호도 잘 잡히지 않는다. 짙은 안개와 폭풍우로 길을 잃을 우려가 있기 때문에 나침반은 필수품이다. 한국인들처럼 스코틀랜드인도 산을 우리의 국가정체성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여긴다. 기후문제에도 불구하고 ‘먼로 배깅’은 오늘날 인기가 많다.


‘먼로 배깅’이 됐건 ‘백두대간 종주’가 됐건 스코틀랜드인과 한국인은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등산을 즐긴다. 토요일이면 등산객으로 가득 차는 도봉산에서나, 양들과만 함께 있어야 하는 한적한 스코틀랜드의 산에서나 즐겁기는 마찬가지다. 단지 ‘빨리 빨리’ 정상을 향해 치닫는 한국의 문화와 천천히 완만하게 인생의 도전을 향해 걸어가는 스코틀랜드의 문화가 조금 다를 뿐이다.


커스티 테일러코리아인스티튜트?연구원, 이화여대?국제대학원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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