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풍산개'처럼 남북오간 탈북자 항소심서 유죄

중앙일보

입력

2008년 탈북해 국내에 정착한 A씨(46)는 한 탈북자 인권단체에 근무하던 중 귀가 솔깃한 이야기를 들었다. 북한에 남아 있는 국내 탈북자 가족의 탈북을 도와 성공하면 적잖은 수입을 올릴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과거 중국과 북한을 몰래 오가며 밀수일을 해왔던 A씨는 북한으로의 잠입에 자신 있었다. 중국 옌지(延吉)에서 차량·은신처 등을 제공받기 위해 B씨에게 연락을 취했다. B씨는 밀수 일을 할 때 알고 지낸 사이다. 북한 현지에서 도움을 받을 인물도 따로 물색해뒀다.

2011년 5월 A씨는 국내에 거주하는 탈북자 3명으로부터 북한에 살고 있는 친인척·가족·어머니 등 6명을 데려와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옌지 현지인인 B씨를 통해 북한 내 조력자와 전화연락이 가능한 상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북한주민 C씨의 집에 의뢰받은 6명의 탈북자 잔류가족이 다 모였다는 연락을 받은 A씨는 같은 해 5월30일 중국 선양(瀋陽)으로 출국, 옌지로 이동했다. B씨의 집에서 이틀간 머문 A씨는 차를 타고 두만강 접경 지역인 충산(崇善)으로 갔다. 이후 북한 국경경비대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두만강을 건넜다.

그는 이어 야산에 숨어 있던 탈북자 잔류가족 6명과 만났다. 협조해준 북한 현지인 2명에게 3만 위안(한화 500만원 상당)과 중국산 휴대전화 3대 등을 수고비 명목으로 건넸다. A씨 일행은 무사히 두만강을 건넜고 탈북에 성공했다. 이후에도 A씨는 5개월간 4차례 더 비슷한 수법으로 북한과 중국을 오갔다. 의뢰받은 북한 내 탈북자 잔류 가족 15명의 탈북을 성공시켰다.

A씨는 2012년 2월 북한에서 자신을 돕던 인물이 북한 보안원(한국의 경찰)에 체포됐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석방시키기 위해 북한 조선노동당 중앙당 지도원에게 뇌물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 ‘풍산개’처럼 남북을 자유롭게 오가며 북한 주민의 탈북을 도운 A씨는 국가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체포돼 재판에 넘겨졌다. 1심 재판부는 “밀입국 행위가 북한의 독재체제에 동조했다고 볼만한 아무런 자료가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국가보안법이 성립되려면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할 위험이 있는 행위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난달 30일 항소심 재판부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를 인정해 벌금 300만원을 선고했다.

수원지법 형사항소2부(부장 최규일)는 판결문에서 “피고인은 통일부 장관의 방북승인을 얻지 않은 채 북한을 오가며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을 위반했다”고 판시했다. 이어 양형 이유로 “대가를 받고 북한을 수 차례 넘나드는 등 죄질이 좋지 않지만 국내 정착 후 아무런 범죄 전력이 없는 점 등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수원=김민욱 기자 kim.min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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