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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원인 안 만난다” 김영란법이 부른 ‘공직 부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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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청탁 및 금품수수 금지법’(김영란법) 시행 첫날인 지난달 28일 부산시 감사관실 직원들이 시청 입구에서 안내문을 나눠주고 있다. [사진 송봉근 기자]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4일 직원조회에서 “정권 후반기가 되면 늘 복지부동이란 말이 나온다”며 “청탁금지법(김영란법) 시행으로 일부에선 정부와 현장 간의 소통이 위축되지 않을까 걱정하지만 눈치 보지 말고 시장과 국민과 소통하라”고 말했다. 통일부도 최근 차관실에서 “김영란법에 위축되지 말고 정상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라”는 특별지시를 내렸다. 앞서 총리실은 지난달 29일 차관회의에서 “김영란법이 시행됐다고 해서 민원인이나 업계 관계자들을 꺼리지 말고 적극적으로 만나라”고 주문했다.

“혹시 부정청탁일까” 정상업무 주춤
공공서비스 기능과 질 떨어뜨릴 우려
유일호 “국민·시장과 적극 소통을”
통일부도 “위축되지 말라” 특별지시
“업무추진비 하위직 확대를” 지적도

김영란법 시행 일주일째다. 법 시행 이후 ‘더치페이’ 문화가 확산되면서 청렴사회 분위기 조성에 기여하고 있다는 평가다. 하지만 해당 부처 장·차관들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공무원들 사이에선 자기 방어를 위한 민원인 접촉 기피 현상이 생겨나고 있다. 복지부동의 기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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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한 민원 전화는 과장한테 돌리고 가능하면 문서로 요청하시라고 해라.” 금융위원회의 국장급 한 간부는 김영란법 시행 직후 직원들에게 이같이 신신당부했다. 금융회사 직원이 전화로 “법안이 어떻게 돼 갑니까”라고 물어만 봐도 자칫 부정청탁에 해당될 수 있다고 우려해서다. 전화로 법안에 대해 물어보고 이에 대해 답해도 법 위반이 아니지만 아예 ‘분란의 싹’을 키우지 않겠다는 게 이 간부의 생각이다.

4일 오후 서울 방위사업청 민원실은 평소보다 한산했다. 입찰에 나서려는 방산업체 관계자들의 방문이 눈에 띄게 줄었다. 방사청 고위 관계자는 “계약 이전에는 당연히 여러 업체 관계자들을 만나야 하는데 보는 눈이 워낙 많아서…”라며 “경쟁업체가 문제를 삼을 수도 있어 3만원 이하라도 식사는 아예 엄두도 내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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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부처의 한 국장급 공무원도 평소 자주 만나던 기업인들과의 만남을 중단하기로 했다. 이 국장은 “근무시간 중 사무실에서 업무 협의를 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며 “부정청탁이 없더라도 투서나 내부고발로 구설에 오르면 당장 인사상 불이익을 받는 게 공무원이다 보니 복지부동이라는 말이 나올 수 있다”고 우려했다.

다른 중앙부처의 과장급 공무원은 “정부 용역 최적임자로 생각했던 대학 교수가 ‘맡겨 주시면 열심히 하겠다’는 의례적인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며 “이런 것도 부정청탁이 아닐까 싶어 정상적인 업무 진행도 주저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민간과 정부, 부처와 부처 간의 교류 축소가 결국 공공서비스의 질을 떨어뜨릴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업계나 타 부처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탁상행정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 부처의 한 과장급 공무원은 “세종시로 옮기면서 안 그래도 현장과 멀어졌는데, 김영란법 시행 이후 더욱 경직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그는 “정권 후반기가 되면 안 그래도 공무원들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비판받는데 김영란법으로 더해지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덧붙였다. 기획재정부의 한 과장도 “같은 공무원끼리도 부탁하고 부탁받는 경우가 많아 약속을 못 잡는다”며 “민간은 물론 공무원끼리, 부처끼리도 벽이 더 생길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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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권익위는 법 제정 당시부터 이 같은 부작용을 예상했다. ‘자기를 위한 직접 청탁’은 설사 부정청탁일지라도 처벌하지 않기로 규정한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걸 김영란법을 피해 갈 방편으로 생각지 않는 분위기다.

김용철 부산대 행정학과 교수는 “공무원을 대상으로 김영란법이 마냥 두려워하거나 과도하게 조심해야 할 법이 아니라는 걸 적극적으로 설명해야 한다”며 “그래야만 업무와 관련된 정상적인 활동을 자신 있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재부 장관 출신인 박재완 성균관대 국정전문대학원장은 “김영란법 시행으로 관가와 민간 간의 소통 경로가 경색될 수밖에 없다”며 “공직자의 업무 추진비 지급 대상을 하위직으로 확대하는 등 대안을 마련하고 차차 보완 방안을 마련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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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차세현·조현숙 기자 cha.sehyeon@joongang.co.kr
사진=송봉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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