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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현이 단식을 접은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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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찬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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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찬호
논설위원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이하 경칭 생략)가 ‘8부 능선’을 넘지 못하고 7일 만에 단식을 중단한 건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곡기를 끊고 물과 소금만 섭취하는 단식은 대개 8일이 고비다. 1983년 민주화를 요구하며 23일간 단식했던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8일째 되던 날 강제로 구급차에 태워져 서울대병원에 입원했다. 더 이상 놔두면 생명이 위험하다는 판단에서 전두환 정권이 취한 조치였다. 90년 지방자치 실현을 요구하며 단식했던 김대중(DJ· 당시 평민당 총재) 전 대통령 역시 8일째 되는 날 탈진하면서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 이정현도 8일째 단식을 이어갔다면 YS와 DJ의 전철을 밟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국민 외면 받는 고통 참을 수 없었을 것
‘박심’ 아닌 ‘민심’ 따라 당 이끌어 나가길

게다가 단식이 8일을 넘기면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된다. 우선 참을 수 없는 복통이 엄습한다. 체내에 쌓인 숙변의 독소가 허약해진 몸을 공격해 머리가 깨지는 듯한 고통을 준다. YS가 회고록에 “온몸을 구르며 비명을 참으려 해도 되지 않았다”고 썼을 정도다. 그 때문에 원래 단식을 하려면 식사량을 단계적으로 줄이면서 미리 관장을 해둬 숙변을 제거하는 게 상식이다. 하지만 이정현은 아무 준비 없이 단식을 강행했기에 숙변의 공격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2일 복통을 호소하며 “죽을 것 같다”고 한 직후 단식을 중단한 게 이를 입증한다.

체중 감소와 체온 저하·혈압 급락의 ‘3종 세트’도 이정현을 괴롭혔을 것이다. 23일간 단식한 YS는 체중이 14㎏이나 빠졌고 체온은 35도까지 내려갔다. 혈압도 115/90까지 추락했다. 단식 보름 만에 혼수상태에 빠진 YS는 17일째 되는 날 강제로 링거를 맞으며 몸에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정현도 단식을 계속했다면 주말쯤 그의 의사와 관계없이 영양주사를 맞으며 단식을 끝내게 됐을 것이다.

다행히 이정현은 그런 단계까지 가지 않고 스스로 단식을 중단했다. ‘정세균 국회의장이 사퇴하지 않으면 목숨을 던지겠다’며 시작한 단식이었지만 정 의장의 사퇴는 커녕 유감표명 한마디 얻어내지 못한 채 일주일 만에 접고 말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육체적 고통이야 참아도 국민에게 외면당하는 정신적 고통은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YS는 단식에 들어가자마자 열화 같은 지지를 얻었다. 정권이 언론보도를 철통같이 막았음에도 소문은 날개 달린 말처럼 국내외에 퍼졌다. 숨죽여온 야당·재야가 잇따라 지지성명을 내고 미국·일본 정치인들까지 집회를 열며 힘을 실어줬다. 야권이 총결집해 민주화의 활화산을 터뜨리는 데 결정적 계기를 만든 것이다.

이정현의 단식은 그런 지지를 전혀 얻지 못했다. 비아냥만 난무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두 달 전 대표가 된 이래 청와대·정부의 독주를 견제하는 여당 리더 본연의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 반면 청와대 심기를 거스른 장관 해임안엔 불같이 화를 내며 당과 상의도 없이 단식에 들어갔다. 권력 눈치나 보며 극단적 행동을 벌이는 정치인에게 공감할 국민은 없다.

이정현이 단식을 접어야 했던 이유는 또 있다. 그의 지역구인 호남에서 단식에 대한 여론이 극히 나빴다. 이정현은 호남에서 재선된 유일한 여당 의원이자, 이에 힘입어 당 대표까지 오른 사람이다. 그러나 대표가 된 뒤 그의 처신은 탕평과 민주주의 증진을 바라는 호남 민심과는 동떨어진 것들이었다. 단식이 그 정점에 있다. 어찌 그를 바라보는 호남 민심이 싸늘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굶어 죽을 때까지 단식하게 하랑께"같은 극언들이 쏟아진 이유다. 이로 인해 이정현이 다음 총선에서 호남 지역구를 잃는다면 그 개인만의 손실이 아니다. 여당이 호남에 공들여 만든 교두보가 무너지는 것이며, 총선에서 모처럼 분 ‘탈지역주의’ 바람이 다시금 후퇴하는 것이다. 이정현도 그런 위기의식은 있었을 터이니 단식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YS 측근인 상도동계 원로는 “이정현에겐 안된 말이지만 솔직히 부끄러웠다”고 토로했다. “YS는 그 어떤 수단으로도 독재에 항거할 수 없던 상황에서 최후의 수단으로 단식을 택했다. 진짜 죽겠다는 결심으로 몸을 던졌다. 지금이 그런 때인가. YS의 단식을 더 이상 욕되게 하지 않고 중단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강찬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