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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은 한시름 놨는데 앞으로는 어쩌나 고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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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9호 4 면

#사례 1. 금융업계에서 대관 업무를 하는 A상무. ‘부정청탁 및 금품수수 금지법’(김영란법)이 시행되고 첫 주말을 맞은 지난달 30일, 퇴근 직후 부인과 함께 남도기행을 떠났다. 모처럼만에 둘만의 여행이 다소 어색했지만 매주 반복되던 골프 약속에 지친 터라 마음은 가뿐했다. 밀린 업무에 추석 때 찾지 못한 처가도 들렀다. 연말까지 빼곡했던 골프 약속을 모두 취소한 A상무는 “앞으로 주말마다 가족 여행을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사례 2. 대기업 계열 면세점에서 일하는 B고문은 요즘 퇴근 뒤 운동 삼아 서울 종로구의 북촌 일대를 누빈다. 공무원들과의 저녁 술자리에서 자유로워진 덕분이다. 지난해와 올해에 걸쳐 면세점 특허대전을 치르며 공직자들과 매일 술자리를 가졌다. 군살도 적지 않게 붙었다. B고문은 “나이가 있어 술 마시고 골프 치는 일이 부담됐는데, 한시름 놨다”며 “점심 약속도 대부분 취소해 종종 혼밥족 신세가 되곤 한다”고 말했다.

김영란법 시행 뒤 달라진 저녁·주말 풍경. 기업의 접대성 식사 자리나 골프 모임이 사라지면서 운동·공부 등 자기계발과 주말 가족여행의 기회가 늘어났다. [중앙포토]

지난달 28일 김영란법 시행 이후 ‘월화수목금금금’을 살던 기업 임직원들에게 주말과 저녁이 돌아왔다. 친분 쌓기를 목적으로 한 접대성 회식·골프 모임이 대부분 취소됐거나 연기됐다. 경찰은 의도적인 단속을 하지는 않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공직자나 기업인 모두 시범케이스가 되지 않으려 조심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자의 반 타의 반’ 늘어난 자기 시간. 이참에 서로 만남을 자제하고 가족과 함께하거나 운동 등 취미에 저녁·주말 시간을 투자하겠다는 분위기다.


자동차 시승, 신제품 발표회도 사라져맞벌이 부부인 한 외국계 은행 간부는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에게 그간 소홀했는데 법 시행 이후부터는 일찍 퇴근해 숙제를 봐주고 잠도 재우고 있다”고 했다. 대형 중공업체의 홍보담당 상무는 “송년회 등 연말까지 저녁 약속을 모두 취소하고 군 입대를 앞둔 아들과 술자리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시절 취미였던 통기타 연습을 다시 시작했고 중국어 학원에도 등록했다. 대형 건설사 홍보담당 이사도 “술 마신 다음 날은 몸이 힘들어 오전 내내 아무 일도 못했는데 이제는 수영 새벽반에 나가기 시작했다”고 소개했다. 대기업 계열 전자회사에서 임원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는 김승재(37)씨는 “지난해 같은 때와 비교해 강좌 신청자가 상당히 늘었다”고 최근 분위기를 전했다. 김영란법이 시행되고 나흘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적지 않은 변화가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식사자리 풍경도 크게 바뀌었다. 광화문·종로·여의도 등 관공서가 밀집한 지역의 고급 한정식·일식집은 한산한 데 비해 구내식당에는 사람이 넘쳤다. 김영란법 시행 첫날인 지난달 28일 저녁 서울 무교동 일대도 한산했다. 이곳에서 가장 손님이 많다는 한 실내포장마차도 테이블이 절반밖에 차지 않았다. 계산을 할 때는 각자 신용카드로 계산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전자업체 홍보실 관계자는 “평소 기자들과 점심식사를 같이 했지만 김영란법 시행 이후엔 직원들끼리 구내식당을 이용한다”며 “기자실 김밥·간식 제공도 중단했다”고 밝혔다.


“차별화된 콘텐트로 무장해야 생존”업무 방식도 서구식으로 바뀔 가능성이 크다. 식사·술자리를 빌려 인간관계를 쌓던 관행에서 벗어나 근무시간 중 짧은 미팅으로 정보를 주고받는 방식이 확산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언론을 대상으로 한 자동차 시승행사, 신제품 발표회 등도 사라졌다. 한 홍보대행사 관계자는 “최소한 법원의 판례가 나올 때까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행사는 하지 않는다는 게 업계 분위기”라며 “전 세계 기자들을 초청하는 글로벌 미디어 행사에 한국 언론만 제외되는 역차별을 해소할 방안을 어떻게 마련할지 고심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처럼 김영란법이 인맥과 접대로 대표되던 한국 공직사회와 기업 문화에 변화의 불씨를 지핀 셈이다. 하지만 내년 이후 어떤 방식으로 홍보 활동을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깊어가는 것도 사실이다. 시중은행 부행장은 “사업 인허가 등 중요 업무가 있을 때는 괜한 오해를 살 수 있어 오히려 관련 기관 사무실 방문을 삼가게 될 것 같다”고 전했다. 한 디자인회사 간부는 “주변이 신경 쓰이는 탓에 되도록 공무원·기자와의 자리를 피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한 벤처기업 임원은 “공식 행사만 열어도 기자들이 모이는 대기업과는 달리 중소기업은 안면 있는 기자들에게 의존해 왔는데 이달부터는 얼굴 보기도 힘들다”고 말했다. 중견 건설회사 이사도 “김영란법 시행 첫날인 28일 정례 조찬 포럼에 7명의 공직자를 초청했는데 단 한 명도 오지 않더라”고 전했다. 총기류를 생산하는 방산업체의 대관 담당 임원도 “지난주 국방부 측 감사에게 식사를 제의했다가 거절당했다”며 “앞으로 백그라운드 브리핑(현안 관련 사안을 비공식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어찌해야 할지 고민”이라고 말했다.


미국 등 선진국과는 달리 공식 로비스트를 인정하지 않는 국내에선 학연과 지연 등의 영향력이 더 커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증권사 홍보담당 이사는 “10년 이상 안면이 있어 자연스럽게 더치페이를 할 수 있는 몇몇 공무원·기자들을 제외하면 식사 약속을 잡기조차 어렵다”고 말했다. 헤드헌팅업체 관계자는 “직무연관성 때문에 취업 전부터 친분이 있는 사람들끼리만 모이게 되는 것이 사실”이라며 “중견기업을 중심으로 인맥을 잘 갖춘 중견 홍보맨을 구해달라는 의뢰가 들어오고 있다”고 전했다.


이제 인간관계보다 업무 경쟁력과 아이디어를 발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통신업체 홍보 담당자는 “골프·식사에 의존하던 과거 업무 방식과 달리 홍보 아이템 발굴 등 차별화된 콘텐트로 무장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을 것”이라며 “홍보의 정상화라고 생각한다”고 평가했다. 자동차 제조사 홍보 임원도 “그간 산업 내 변화나 트렌드를 살필 시간이 없었는데 요즘은 공부 차원에서 기술·산업 동향 등을 살펴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유경 기자 neo3@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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