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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채시장이 다시 꿈틀댄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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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사채시장을 찾는 발길이 요즘 다시 늘고 있다.
최근 전경련 조사에 의하면 총 차입금 중 사채비율이 20%를 넘는 기업이 9·2%로 지난해6·9%보다 약 3%포인트나 높아졌다.
기업의 급전창구로 성시를 누려 오다 돈이 밀물처럼 풀리기 시작한 작년 말을 고비로 갑자기 위축돼 온 명동·충무로 일대 사채골목은 요즘 들어 조금씩 활기를 되찾고 있다. 금년 초에는 명동사채시장에 휴업(?)의 바람이 불 정도로 한산했었다.
한때 자취를 감추다시피 했던 물품대전으로 발행되는 진성어음이 다시 사채시장골목에 줄지어 나타나는가 하면 은행에서 자금지원을 넉넉히 해주어 아주 졸업하는가 싶던 건설·조선 등 왕년의 단골기업들이 총총한 발걸음으로 찾아와 사채시장의 문을 노크하는 실정이다.
무역금융·설비금융 또는 부실기업지원자금 등 술술 풀리던 은행 돈줄이 해외부문에서의 통화급팽창여파로 일반자금 대출이 강력 억제되자 사정은 바뀌고 있는 것이다.
직·간접으로 사채시장에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은 사채시장이 다시 꿈틀하고 있는 현실을 보고『뭔가 조짐이 있는 것 아니냐』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기업에 있어 사채는 필요악적인 존재. 긴급자금이 필요한 기업의 숨통을 터주기도 하지만 워낙 단기고리라 아차 하다가는 경영에 치명타를 가하기도 한다.
작년 초 몰락한 국제그룹이 말년에 빚을 끄느라 빚을 끌어쓰는 악순환에 휘말려 해체당시 무려 5천억 원의 단자 빚을 지고 있었던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또 얼마 전 부도를 낸 유명 의류업체인 이환 실루엣도 명동일대서만 20억 원의 사채를 끌어썼던 것으로 얘기되고 있다.
언제 자금난에 빠질지 모르는 기업에 돈을 대주고 수렁에 빠진 기업을 상대로 높은 이자를 받는 사채업자는 뗄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심지어 기업의 경영을 맡고 있는 사람가운데 자신이 경영하는 기업을 상대로 사채놀이를 하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땅 짚고 헤엄치기 식의 고리장사다.
은행돈을 못 얻고 단자대출도 여의치 못한 경우 기업은 보험회사나 신용금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명동·충무로 일대 사채업자를 찾는 것은 정해진 코스.
그래서 사채시장은 금융시장에서 신용이 없는 한계기업들 뿐 아니라 긴급자금을 구하는 일반기업에도 요긴한 곳. 회사 경리부장정도면 으레 몇 명씩의 사채업자와 선이 닿아 있게 마련이다.
긴축바람이 심했던 지난 84년 신종사채인 일명 완매채가 1조5천억 원 규모까지 불어나 사채시장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었는데 요즘은 그때보다 줄었다는 것이 다수의견.
고리로 은밀히 거래되는 사채가 얼마인지 정확한 숫자는 아무도 모른다. 그때그때 시중자금사정에 따라 달라질뿐더러 거래자체가 음성적이기 때문이다.
은행의 부실기업 지원자금살포로 작년 말이래 발을 끊었던 건설·조선 등 구조적 불황업체들이 최근 사채시장에 다시 돌아오고 있는 것은 이들 업계에 자금난이 가중되고 있음을 반증한다.
건설업계의 L사·J사 등 아예 은행관리로 된 업체들을 제하고는 S사·D사·H사·K사 등 오랜 단골이던 불황기업들의 어음이 다시 사채시장에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얘기다.
사채시장 주변사람들은 한계기업에 대한 은행의 일시적 자금지원이 한계에 달했기 때문이며 앞으로 이런 「고객」들이 속속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돈 풍년이라 하지만 올 들어서도 단자나 신 금 등 제도금융권을 통해 소위「조성자금」이라는 이름의 고리사채를 끌어쓴 기업은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제약·의류·식품 등 내수업체들 가운데는 남아돈다는 보험자금도 얻지 못하고 사채신세를 지고 있는 곳이 적지 않다. C식품처럼 이제계열사 보증 없이는 사채도 못 쓸 정도로 악화된 곳도 있다.
반면 한때 불황으로 자금난에 허덕였던 면 방 업체들은 요즘 수출경기에 얹혀「공전의 호황」을 누리면서 사채시장에서 사라졌고 무역금융에 수출대전까지 쌓인다는 몇몇 기업들은 거꾸로 어음매입을 위해 남아도는 돈을 갖고 사채시장을 찾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자금난」을 겪는 것은 영세상공인들도 더욱 예외가 될 수 없다. 종로 2, 3가에 포진한 소액 사채브로커들의 사무실에는「급전 놀분·쓸분」이란 신문광고를 보고 울려오는 전화벨소리가 줄을 잇고 있다.
이곳에서는 담보를 대고 월 2·5∼4%의 높은 이율에 수천 만원의 긴급거래가 이뤄 지는 게 보통.
보험·신금 등 이 개인대출을 대폭 늘리면서 종로일대의 사채브로커들이 다소 재미를 잃긴 했지만 요즘 다시 고리라도 융통하려는 영세업자들의 주문이 쇄도하고 있다는 얘기.
심지어「바캉스급전」등등 최고 월 10%짜 리의 직장인상대 소액 신용대부조차 버젓이 거래되고 있다고 귀띔해 준다.
물가안정이 정착되고 공 금리와 사 금리간의 차이가 좁혀지고, 그리고 자본시장발달로 기업의 자금조달방법이 다양해짐에 따라 장기적으로는 사채는 설 자리가 줄어들게 돼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그러나 당장 기업의자금수요가 왕성한데다 은행돈줄이 타이트해 짐으로 해서 사채시장은 활기를 띠어갈 전망이다.
사채시장의 활기를 반영, 이 달 들어 사채시장서 거래되는 A급 기업 진성어음의 할인율은 욀1·3∼1·5%로 지난 6월의 1·25∼1·3%보다 오름세를 보이고 있다. B급 어음은 1·6∼1· 9%, C급은 2%이상으로 역시 반등기미를 보이고 있다.
돈이 많이 풀려 인플레우려가 높아가는 마당에서 사채시장이 다시 꿈틀거리는 현상, 이것은 통화정책에 무엇인가 큰 문제가 있는 것임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닐까. <박신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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