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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훙샹, 장성택 처형 후 더 성장 … 북한에 대단한 동아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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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8호 6 면

1 단둥시의 훙샹실업그룹 본사는 24일 오전 출입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2 훙샹 본사는 단둥시 압록강변에 있는 신안둥커 쌍둥이 빌딩의 오른쪽 건물 16층에 있다. 왼쪽 건물에는 북한 은행인 조선광선은행 대표부가 올봄까지 입주해 있었다. 단둥=예영준 특파원

중국 랴오닝성 단둥(丹東)은 북한 경제의 생명줄과도 같은 곳이다. 압록강에 걸친 단선(單線) 다리인 조중우의교(朝中友誼橋)를 통해 식량을 포함한 생필품·일용품과 건설자재·기계·부품 등 온갖 물건들이 북한으로 들어간다. 그 틈에 섞여 북한 핵 개발에 필수적인 물자들이 들어가고 있었다는 사실이 최근에야 공개됐다. 우라늄 농축 등 핵무기 개발에 필수적인 알루미늄관 등의 특수 물자가 단둥의 대북 무역업체 훙샹(鴻祥)그룹을 통해 조달돼 온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이 때문에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을 비롯한 중국 지도부가 진노했다는 말도 흘러나온다. 중국 당국이 전례 없이 강력한 수사에 착수함에 따라 마샤오훙(馬曉紅) 회장의 몰락은 물론 훙샹그룹이 공중분해될 운명에 처했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24일 압록강변 신안둥커(新安東閣) 건물의 16층 훙샹 사무실은 출입문이 굳게 잠겨 있었고 전기를 켜지 않아 암흑천지로 변한 복도는 훙샹그룹의 미래를 상징하는 듯했다.


단둥에선 “대북 사업 종사자치고 마 회장을 모르면 간첩”이란 말이 상식으로 통하고 있었다. 마 회장을 만나봤다는 사람도 어렵지 않게 몇 사람 찾아낼 수 있었다. 그들은 “사업 수완이 대단히 뛰어난 여장부”라고 입을 모았다.

1971년생인 마 회장은 91년 단둥의 진청상창(金城商場)이란 쇼핑몰 직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듬해부터 99년까지는 무역업체인 랴오하이(遼海)수출입공사 단둥지사의 직원으로 일하며 20대 시절을 보냈다. 당시 북한은 ‘고난의 행군’이라 불리는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공장 설비나 부품 등을 뜯어 폐철강으로 중국에 내다파는 일이었다. 무역회사 직원인 마도 이 무렵 대북 무역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는 2006년 중국 주간 ‘남방주말’과의 인터뷰에서 “하루에 10t 트럭 100대로 옥수수를 실어다 주고 북한 물건을 실어다 날랐는데 거의 모두 기계부품이었다”고 말했다.


98년 시작된 한국의 햇볕정책은 단둥의 대북 무역상들에게 돈방석에 오르는 기회를 제공했다. 북한산 물건을 헐값에 사 한국으로 보내면 가격 차이로 이익을 남기는 건 물론 관세 면제 등 세금 혜택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20대 시절 북한과의 무역 경험을 쌓은 그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2000년 1월 자본금 1억9000만 위안으로 훙샹실업을 설립해 북한이 필요로 하는 밀가루·옥수수·석유 등을 조달해 줬다. 북한에 대형 트럭 80대를 제공했더니 그 대가로 석탄·철광석·금속류를 수입할 수 있게 해줬다.


2006년 10월 북한이 첫 핵실험을 한 직후 다른 대북 무역업체들이 동요하는 중에도 그는 중유 2000t을 수출하는 등 북한과 거래를 계속했다. “북한과의 거래는 어차피 도박이 필요하다”는 지론에 따른 것이었다. 그 무렵 훙샹은 단둥의 최대 대북 무역 업체로 성장해 있었다. 영세 무역상들은 훙샹에 거래를 위탁함으로써 북한의 물건값 체불이나 말 바꾸기 등의 리스크를 줄일 수 있었다. 오늘날 “단둥 무역의 절반은 훙샹을 통한다”는 말이 나오게 된 이유다. 무역상 K씨는 “5·24 조치 전에는 한국인 사업가들도 중국인 동업자를 통해 훙샹에 위탁해 대북 거래를 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고 말했다.


2011년부터 지난해 9월까지 4년9개월 동안 훙샹의 대북 거래 규모는 5억3200만 달러(약 6000억원)였다. 이는 북한이 2004년부터 10여 년간 개성공단을 통해 벌어들인 것과 비슷한 액수다.


배짱과 수완 이외에 그에겐 인맥이란 자산이 있었다. 그 무렵 훙샹의 북한 측 최대 파트너는 승리무역이었다. 북한의 2인자이던 장성택이 장악한 무역회사였다. 대북 소식통은 “단둥에선 마 회장이 장성택의 후광을 업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란 사실은 2013년 장성택 처형 후에 드러났다. 소식통은 “장의 처형으로 외상 대금 3000만 달러가 공중에 떠버렸고 훙샹도 내리막길을 갈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회사는 더 성장했다. 훨씬 더 단단한 동아줄이 있는 것 같은데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 아니면 군부 아닐까 짐작만 할 뿐”이라고 말했다.


북한의 중국 내 거점 중 하나인 선양(瀋陽) 칠보산호텔의 지분을 갖고 부회장이 된 것도 북한과의 관계를 더욱 튼튼히 했다. 대북 소식통은 “대대적인 리노베이션 공사를 대행해주고 공사대금 대신 지분 30%를 받았는데 이 역시 북한과의 든든한 관계를 보여주는 게 아니냐”고 말했다. 이 밖에 대북 물류회사, 여행사, 식당 등도 운영했다.


마 회장은 중국의 ‘관(官)’에도 인맥을 쌓고 영향력을 키워왔다. 2008년부터 ‘우수 공산당원’으로 선정돼 영예증서를 받은 그는 2013년 랴오닝성 인민대표로 선출됐다. 이처럼 성공가도를 달리던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핵무기 전용 가능 물자를 북한에 공급해 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북한 체제를 신봉하고 북한이 핵 보유 국가가 되는 데 기여하고자 했던 것일까. 1년여 전 그를 만나 장시간 대화를 해본 적이 있다는 중국인 N이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북한을 잘 알기는 하지만 맹목적으로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북한에 대한 불만도 솔직하게 얘기했다. 더구나 그는 사업가일 뿐 정치체제에 대해선 큰 관심이 없어 보였다.” 실제로 그는 2006년 인터뷰에서 “대북사업은 정치적 요소와 무관하다. 정세가 어떻게 변하든 우리의 사업 발전을 위해 분골쇄신 일할 뿐”이라고 말했다.


어쩌면 오늘날의 훙샹을 만든 대북 커넥션이 그의 몰락을 재촉한 것인지 모른다. 대북 커넥션에 힘입어 성공한 그가 북한의 핵 개발 물자 주문을 뿌리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마 회장을 안다는 K는 이렇게 말했다. “대북 무역은 항상 정치적 리스크가 따르는 법인데 너무 거침없이 앞만 보고 달려간 게 결국 몰락으로 이어진 게 아닌가 생각된다.”


단둥=예영준 특파원 yyju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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