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교수의 반성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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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이른바 「민주화 시국선언」에 서명한 교수들에 대해 서울대 측이 앞으로는 참여 않겠다는 내용의 반성문을 요구했다는 것은 한마디로 국민들을 우울하게 하는 소식이다.
지난 4월 시국 선언 후 서명교수들에 대해 학술연구비 지급대상에서 제외하고 보직임명 거부 등으로 물의를 빚더니 마침내 반성문을 요구함으로써 당국에 의한 보복조치는 한층 에스컬레이트 되는 인상을 짙게 해주고 있다.
손 문교의 말처럼 서명교수들의 행동이 『시류에 편승이나 하듯 우리의 교육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측면이 전혀 없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어려운 정국을 풀기 위해 헌특 구성을 통해 여야간 「대 타협」의 실마리나마 풀려는 마당에서 당국의 그와 같은 조치가 과연 시국수습을 위해 무슨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지부터 묻지 않을 수 없다.
연구비를 안주고 보직임명을 거부한다는 것은 그래도 무슨 근거가 있으니까 행사하는 것이겠지 어림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대학교수들에게 반성문을 쓰라고 요구한다면 문제는 사뭇 달라진다.
대학생만 돼도 자기 소견이나 책임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엄연한 인격주체다. 그들에게 반성문을 쓰라고 해도 반발할 것이 뻔한 터에 대학교수들 보고 그걸 강요한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문교부장관이나 대학총장은 행정적으로 상위자일 수는 있어도 대학교수들을 보고 양심에 관한 문제를 갖고 명령하는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고 인격적으로 학문적으로 더 우월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의 눈에나 분명하다. 민주화란 말을 쓰는 것조차 꺼림칙하게 여기던 때라면 또 모르겠다. 그러나 지난 몇 달 사이 세상은 금석지감이 들만큼 달라졌다. 국정의 최고책임자인 대통령이 민주화 3개 원칙을 천명했고 집권당의 대표도 민주화추진 5개항을 발표, 이 나라의 진정한 민주화를 다짐하게된 것이 작금의 커다란 변화가 아니던가.
선언교수들의 대부분이 민주화야말로 오늘날의 난국을 풀어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며 대세라는 판단에 따라 서명한 것으로 우리는 알고 있다. 설혹 그 가운데 시류에 편승하고 학생들에 영합하고자한 사람들이 있었다해도 그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리라고 믿는다.
교수들이 학생지도를 하면서 실정법을 위반했다면 그에 따른 응분의 조치는 해야한다. 그것이 법치주의의 정신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모든 일을 법대로 처리한다고 하면서 이 나라 지성을 대표하는 대학교수들의 행동에 행정편의나 권위주의적 방식으로 대응하려고 할 때 법의 권외는 어디서 찾을 것이며 누가 법을 지키고 따르려 하겠는가.
법적 근거에 따른 조치라면 비록 그것이 악법일지라도 일반도 납득하고 본인도 승복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명확한 법규의 근거도 없이 보복의 인상을 주는 반성문 강요나 한다면 그것이 누구를 위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지금 우리는 주장과 견해를 달리하는 세력간의 타협을 통해 시국을 수습하려는 매우 조심스럽고 예민한 시점에 있다.
이럴 때일수록 각자는 자신의 독선이나 아집에 매달리지 않고 상대방의 이견도 폭넓게 수용하는 대국적인 아량을 보여야 한다. 서명교수들의 행동이 괘씸하게 여겨질지라도 거기에만 집착해서 서명교수들을 못살게 군다면 가뜩이나 어려운 판국에 또 하나의 불안요인만 가중될 뿐이다.
상처를 건드려 일파만파의 부작용을 일으키기보다 예민한 문제일수록 대범하게 넘기는 것이 난국을 순리로 푸는 슬기임을 강조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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